대학생 독자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컴퓨터 앞에서 컵라면을 먹게할 정도로 재밌었던 인터넷 게시판과 리플들,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개인 홈페이지를. 이를 두고 여러 언론들은 드디어 ‘화장실 낙서’가 사라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낙서의 매력인 익명성과 적나라함은 인터넷 게시판에도 있으므로 좀더 많은 사람들과 ‘낄낄’댈 수 있는 게시판에다 쓰지, 굳이 낙서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란 논리였다.

그러나 사흘에 걸쳐 대부분의 학교 건물, 가까이에 있는 이화여대 화장실을 돌며 화장실 벽을 훑어보니, 그 때 그 언론들은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이었다. 화장실벽 페인트칠이 여러 번 있었지만(심지어 이화여대 총무과에서는 청소하시는 아주머니한테 지우라고 했단다. 제발 낙서 좀 그만해달라는 아주머니의 말씀.) 아직도 일일이 다 적기 힘들만큼 많은 낙서들이 있었다. 사실 그 옛날의 기사들에 나온대로 학교 곳곳에 컴퓨터가 있고 이제는 생활이 돼버린 싸이월드 미니홈피, 각종 익명게시판과 포털기사 리플게시판 등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낙서할 곳들이 천진데 굳이 화장실에 낙서하는 이유는 뭘까?

지우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는 중도 여자화장실의 모습. 지우는 사람도, 그 위에 다시 쓰는 사람도 안쓰럽다 화장실 낙서의 이유 ‘화장실에서 낙서를 왜 하는지’에 연구한 논문은 없다. 따라서 화장실 곳곳에 있는 낙서로 그 이유를 추측해보겠다. 첫째, 화장실은 사방이 막혀있고 좁다. 기본적인 것만 갖춘 심플한 화장실, 읽을거리가 없으면 주민등록증이라도 꺼내 읽어야한다는 한국인들에게 심심함은 고통이다. 화장실벽에 낙서가 없다면 ‘첫빠’를, 낙서가 있다면 ‘리플’을 다는 재미는 각별할 것이다. 혹시 변비라도 있다면 주섬주섬 펜이라도 꺼내 더더욱 낙서를 즐길 듯. -왜 낙서 지워요? 낙서 없으면 심심한데. ㅋㅋ 중앙도서관 2층 여자화장실-본좌 변빈데...기다리는 사람이 넘 많소ㅠㅠ 미안 + 민망하오Re: 괜찮소! 힘내시오! ㅎㅎ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여자화장실 둘째, 비슷한 생활범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쓰므로 공감대가 형성된다. 한창 유행했던 ‘1986년생 공감자료’를 1986년생인 사람이 읽으면 공감하면서 친밀감과 재미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특정 화장실-예를 들면 단과대 화장실-을 자주 쓰는 사람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낙서를 즐기기도 한다. -이과대 좋아요~*ㅎ내 집같은 편안한 복장 입어도 개성만점 ㅎ Re: 근데 이러면 백양로에서 여기까지 올 때 대략 낭패Re: 서문으로 다님Re: 이과대는 예쁜 애들도 안 예뻐진-_-이과대 한학기 다니면 과제에 폭삭! 늙는다.Re: 공대도 마찬가지. 공대는 제3의 인종이 된다.Re: 실험 땜에 치마도 못 입고Re: 이과대생의 비애ㅠ이과대 1층 또다른 여자화장실 중앙도서관 2층 여자화장실
셋째, 화장실 낙서는 인터넷 게시판보다 더 철저하게 익명성을 보장한다. 익명게시물이라도 오류가 생겨 글쓴이의 이름이 공개되기도 하고 로그인을 하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게시판 역시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IP추적이 가능하다. 반면에 화장실 낙서는 필체를 대조해보지 않는 한 익명성은 확실히 보장된다. 친구에게도, 부모님께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야기들, 이곳에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낙서들은 그리 오래 남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학교에서 전체적으로 화장실 시설개선 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세계지도는 중앙도서관 5층 남자화장실에 있던 세계지도로 모 방송사에서 ‘끝내주는 세계지도 낙서를 취재하기 위해 왔다’고 중도를 방문할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 낙서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중도 관리운영과 김미정 과장은 “따로 낙서를 지워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지만 화장실 환경개선사업에 도색 작업이 포함돼있었다”고 밝혔다. 

중앙도서관 5층 남자화장실에 있었다는 세계지도 낙서 한편, 중도 관리운영부 김상범 부장은 “오래 보존할만한, 가치있는 낙서가 있느냐”며 화장실 낙서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어 그는 “예전에 인신공격성 낙서가 화장실에 쓰여졌던 적이 있는데 경찰들이 출동해 필체분석, 현장보관 등을 한 적이 있었다”며 낙서가 단지 낭만적이고 재밌는 것은 아님을 강조했다. 낙서 권하는 학생회? 지워도 지워도 다시 쓰는 낙서가들과 포기하지 않고 환경개선사업을 벌이는 학교. 이런 소모전이 벌어지는 학교 안에서도 ‘낙서를 권장하는 화장실’이 있다. 39대 이과대 학생회에서는 화장실 소식지를 만들어왔다. 이과대 관련 공지사항, 설문조사 결과, 정책토론 등이 실리고 그 하단에 낙서할 수 있는 빈칸이 있어 화장실 사용자들이 자유롭게 낙서할 수 있다. 도서관 건의사항, 개인적인 고민, 음담패설 등 기존에 화장실벽에 했던 낙서들이 종이 위로 옮겨왔다. 낙서를 하는 주체는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화장실에 낙서할 수 있는 공간을 설치함으로써 교수, 직원까지 구성원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43대 이과대 학생회장 한진택군(물리·02)은 “화장실 소식지를 확대개편해 화장실과 과·반·동아리방에 설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화장실 소식지가 가득. 낙서도 가득하다.
지금 학교에 남아있는 화장실 낙서들, 그 낙서들의 내용이 보드랍든지 거칠든지 그 자체로 전해질 수는 없을까. 지금, 여기에 남겨두는 작은 흔적일테니 말이다. 물론 나, 혹은 우리가 근거없는 낙서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글 한정원 기자 bravo_my_life@yonsei.ac.kr

                                                       /사진 신나리 기자 journar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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