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 시대를 초월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작품을 일컫는 단어다. 음악이나 미술처럼 오래된 예술장르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고전’과 ‘만화’는 어색한 조합이다. 만화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지만 아직 만화는 흥미 위주의 장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의 불모지였던 1960년대부터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고 현재까지도 주목받고 있는 만화가가 있다. 『임꺽정』, 『삼국지』, 『수호지』 등의 걸작을 남긴 한국만화계의 거장 고(故) 고우영 화백이다. 지난 2005년 타계한 그는 4월 25일 4주기를 맞았지만, 그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꺼지지 않고 있다.

고우영의 만화가 원소스 멀티유즈 산업의 ‘원소스’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갖는 가치를 되새겨 준다. 그의 대표작 『일지매』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서자 일지매의 의적 활동을 그린 무협물이다. 『일지매』가 따로 원작이 있는 게 아니라 고우영의 순수창작물이라는 것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1월 초 방영된 MBC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는 이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원작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는 평을 받으며 2주 연속 시청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반짝 타오르다 사라지는 수많은 문화코드 사이에서 고우영의 작품이 유독 ‘롱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헐렁한 듯해도 인물의 특징을 날카롭게 살리는 탁월한 그림체와 아무리 복잡한 줄거리라도 짧은 연재분 안에 ‘맛있게’ 담아내는 구성력을 꼽을 수 있다. 『고우영 이야기』의 공동저자 김낙호씨는 그의 서술 방식을 “물 흐르는 듯한 유연함과 순간적으로 충격을 주는 교묘한 페이스 조절”이라고 평가했다.

만화가로서의 천재적인 자질 말고도, 고우영 작품의 진가는 인간 사회를 향한 그의 꾸밈없는 시선이 작품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고우영 이야기』의 공동저자 임범씨는 『삼국지』를 예로 들며 “조조나 유비 등 어느 인물도 선악의 기준으로 갈리지 않는다”며 “이해관계에 따라 냉정하게 움직이는 인간사를 포착하는 한편 코믹요소를 재치 있게 버무렸기에 질리지 않는 매력을 갖춘 것”이라고 말했다.

고우영은 또한 성인을 대상으로 극화 형식의 만화를 처음 그렸다는 점에서 만화사적 의의를 지닌다. 1960년대만 해도 만화는 어린이용 일색이었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은 시사만평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가 「일간스포츠」에 『임꺽정』을 연재하면서 신문 판매부수가 세배 이상 증가했다. 이때부터 성인도 재미를 위해 만화를 즐기는 사회분위기가 생겨났다. 「한겨레」에 『비빔툰』을 연재하고 있는 홍승우 작가는 “『수호지』의 캐릭터 ‘무대’를 좋아하는 대학생들이 팬클럽을 만들 정도로 그는 본격적인 성인만화의 분출구를 열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에는 독재정권시대에 검열로 삭제됐던 부분을 완전히 복간한 『신(新) 고전열전』시리즈가 나왔다. 이 중 『삼국지』는 50만권, 『십팔사략』은 40만권이 팔려 팬들의 애착이 건재함을 보였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한국 100대 도서’에 『일지매』가 선정돼 작품성면에서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홍 작가는 “특유의 글맛과 풍자적 유머가 잘 어우러진 점 때문에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이 만화뿐만 아니라 문학의 범주에서도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화라는 형식 안에 진솔한 인간의 모습을 해학과 함께 담아낸 거장의 열정은 시대, 국경, 장르를 넘어 ‘고전’의 향기로 피어나고 있다.

고우영이 그린 대표적인 캐릭터 '일지매'

양준영 기자 stellar@yonsei.ac.kr

자료사진 고우영 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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