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공공 인프라’를 창출하는 공간… 경쟁이 아닌 협력의 가치가 절실하다”

우리대학교 학내 청소노동자들은 시급 400원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네 달간 이어왔다. 지난 2일 구두합의가 이뤄져 최종 합의서 체결을 앞둔 상태다. 그러나 시위를 둘러싸고 터져 나온 여러 논란은 여전하다. 소음에 맞선 소송, 노동권과 학습권의 충돌. 모두 대학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연세춘추 사회부 기획취재팀은 우리대학교 학생으로서, 대학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청소노동자의 동료 시민으로서 대학을 돌아보고자 했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각자도생의 정글로 변하고 있는 지금,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논의하는 장이 대학에 절실하다. 세 편의 기획을 반성문 삼아 대학사회에 묻는다. 대학은 어떤 공간이어야 하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기자 주>

 

202011, 조형근(55)씨는 대학교수직을 떠나 무직자가 됐다. 대학교수라는 직은 그에게 자유로운 사색의 시간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는 2019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수많은 학술행사와 잡무, 수시로 날아오는 공문과 각종 평가, 주민 대상 봉사활동 등등. 이 모두를 위한 끝없는 회의와 전화통화와 메일작성과 서류작업에 탈진했다.’ 교수들은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기준에 부합하는 연구 실적을 계속해서 요구받는다. 그는 대학에 적()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을 떠나 경기 파주시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한국 대학의 지식생산체제를 꼬집는 동네 사회학자로 활동한 지 어느덧 2년째다.

오늘날 대학은 교육이라는 상품과 학점이라는 서비스를 고객(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진리를 탐구하고 지성과 인격을 통찰하는 대학의 역할은 실종된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교육 서비스를 구매한 학생들에게서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먹고사는 청소노동자라는 발언이 서슴없이 나오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는 연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 공동체 전체가 경청하고 숙고해야 하는 이야기다. 대학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대학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는지 거대한 질문을 가지고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우리신문사 편집국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 대학 교수 시절 한국 대학의 구조적 문제를 절감한 조형근(55)씨는 현재 교수 직함을 내려놓고 동네 사회학자로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 대학 교수 시절 한국 대학의 구조적 문제를 절감한 조형근(55)씨는 현재 교수 직함을 내려놓고 동네 사회학자로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Q. 지난 4월부터 연세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학내 시위가 이어지자, 일부 대학생들이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A. 충격을 받았다.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명문대 학생들이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시위로 피해를 입었다며 분노하고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도움을 주고받는 동료로서 노동자를 바라보는 감각 자체가 약해진 것이다. 동시대의 상식을 건드린 사건이라 생각한다.

 

Q. 대학 내 한 집단의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 같은데.

A. 그렇다. 약육강식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살아남아 승리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사고방식이 대학사회 내부에 만연해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도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된다는,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주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이 확산되던 시기인 1990년대부터 우리 사회가 협력보다는 경쟁을 자신의 신념이자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Q. 연대와 협력이 아닌, 경쟁을 강조하는 사고가 20대 사이에 만연하다는 것인가.

A. 젊은 세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산물인 무한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 비해 연대와 협력의 가치관을 더 체화하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건 한국인이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급속하게 공유하게 된 역사적 맥락이다. 군부 독재, 재벌 경영, 인맥과 같은 우리 사회의 봉건적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1990년대 말부터 제시된 대안이 바로 시장 모델을 적용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기조하에 시장의 합리성을 빌려와 봉건적 네트워크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Q. 공정한 경쟁을 둘러싼 갈등이 부상한 시작점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A. 이전에는 봉건적 후진성으로 인해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당시에는 경쟁 자체를 가능하게 만들려 했다. 진짜 실력능력으로 승부를 보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당대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하지만 경쟁 구도에서는 탈락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국가는 탈락한 이들을 복지제도로 품어주려 했다.

 

Q. 무한 경쟁을 강조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나.

A. 국가는 재분배에 실패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당한 경쟁 절차를 거쳐 성공했으니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만, 너희는 경쟁에서 탈락했으니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야라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구도는 우리 사회가 경쟁에서 탈락한 노동자와 하층 계급의 문제를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과 분리해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경쟁 만능주의는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Q. 청소경비노동자 소송 사건으로 대학 공동체의 각자도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역시 경쟁이 격화하는 시대에서 비롯된 문제라 볼 수 있을까.

A. 그렇다. 경쟁을 과도하게 지향하는 사회의 배경에는 기회 구조의 병목 현상이 있다. 정치철학자 조지프 피시킨이 말하는 병목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명문대생은 사실 좁아진 기회의 병목을 원활하게 통과할 수 있는데도 그 심리적 압박은 과거에 비해 훨씬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목표를 성취하더라도 다음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특혜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사람이라 여기기 시작한다. 이들은 청소노동자에 제기한 소송뿐만 아니라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불공정 논란을 모두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는 요소로만 여긴다.

 

Q. 그러한 선택적 공정은 우리 사회의 약자 혐오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A. 소수자약자 혐오 정서는 우리 사회 구조가 엘리트와 비엘리트, 두 개의 세계만으로 분리된 후과라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데 있어서 분노를 표출한다. 이 분노에서 멸균에 대한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타인과 얽혀있을 수밖에 없는 게 삶의 섭리다. 멸균 상태로 대중과 멀어지다 보면 결국 사람들은 고립된다. 사회적 비용을 크게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대학 안에서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Q. 사회적 관계보다 개인의 권리가 더 중요해진 경쟁 사회에서 공동체 가치가 실종될 수 있다는 지적으로 들린다.

A. 그렇다.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는 불평등을 은폐한다. 흔히들 계층 이동 문제를 이야기할 때 사다리 비유를 든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졌다’, ‘사회적 이동을 위한 사다리를 복원해야 한다는 식이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이러한 비유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구조적 불평등을 없앨 생각을 해야지, 수직적 위계를 전제하는 사다리를 혼자서 잘 오를 수 있게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계층 상승의 문제로 돌리는 건 사다리 자체를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는 발상이다.

 

조형근씨는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에서 실용적 지식의 생산 기지로 변화해 온 맥락을 살펴보려면 1990년대부터 이어진 대학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사회의 변화는 지식 정보 경제론인적 자본론이라는 두 축을 교차하며 만들어졌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를 필두로 서구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지식 정보 경제론은 지식이 곧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명제를 핵심으로 한다. 이때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은 생산력의 핵심 기지가 된다. 인적 자본론은 토지, 노동, 자본이라는 생산의 3요소를 부정하는 대신 노동을 자본의 일부로 간주한다. 노동을 투자와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흐름 속에서, 대학은 인적 자본을 길러내는 곳으로 부상했다.

그는 지난 2019한겨레21지식인의 죽음, 때늦은 슬픔이라는 칼럼을 실었다. 그는 대학이 자본을 생산하는 공간으로 변하는 동안 대학이 생산하는 지식이 점차 민중과 유리되는 지점을 지목했다. ‘재야 연구소들은 대개 학회로 전환해 제도권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주류가 됐다. 대중을 향해 서점에 깔리던 독립 학술지들은 학회 회원에게만 우송되는 등재지가 됐다. 과장하자면 필자와 심사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읽지 않는 잡지가 됐다.’ 다음으로 그는 이 야속하면서도 위험한 변화의 배경을 짚어냈다.

 

Q. 1990년대부터 정부의 대학 정책은 어떻게 바뀌어왔나.

A. 20세기 말부터 대학은 생산과 이윤을 높이는 데 필요한 인력을 확충하는 기관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19955.31 교육개혁이 그 기점이다. 당시 설계된 교육 제도의 기본 골간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교육이 우수하고 탁월한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교육의 수월성’, 교육을 받는 사람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수익자 부담 원칙이 그것이다. 인적 자본을 길러내고, 경쟁력을 강화하고, 지식을 실용적인 것으로 바꿔낸다는 대학 교육의 기조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여태 한 번도 뒤집힌 적이 없다.

 

Q.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말이 무색해 보인다.

A. 대학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인적 자본을 키우는 등 실용적인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 진리 그 자체에 봉사해야 한다. 실용적인 목적에 봉사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실용적인 목적과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진리 자체를 탐구하자고 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대학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이 강조돼왔다. 이 명제는 상식으로 여겨져왔지만, 이제 무너지기 시작했다.

 

Q. ‘실용적인 대학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A. 대학 서열화를 둘러싼 인식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본인의 서열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허위나 위선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나 서열화가 잘못됐다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서열 그 자체보다는 잘못된 서열화에 분노한다. 상대를 짓밟고 올라가 경쟁하는 세태를 비판해야 하는 대학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Q. 대학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수 집단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해주신 바 있다.

A. 서열화가 곧 세계의 규칙이 되면서 연구 영역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교수들은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실적 쌓기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경쟁의 결과가 곧 정부의 대학 지원과 연계되는 상황에서 대학 서열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위 비판적이거나 진보적인 교수들조차도 순위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을 경쟁의 공간으로 재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Q. 교수들이 어떻게 대응했어야 한다고 보나.

A. 교수들이 더 치열하게 연구 실적 체계의 변화에 맞서야 했다. 사실 단 한 명의 교수도 현재의 연구 실적 체계에 찬성하지 않는다.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모두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모든 교수 지식인이 이 체계에 일관되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씩의 저항은 있었으나 큰 틀에서 보면 결국 다들 순응한 셈이다. 교수자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연구에 열중한다는 기능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작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Q. 대학사회의 변화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클 텐데.

A. 현재의 지식생산체제는 학생들을 대학 교육서비스의 소비자로 바라본다. 이때 대학이 취업 사관학교로 간주되는 동안, 학생 집단은 점점 더 동질화되고 있다. 학생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일원화될 때 다른 가치가 들어설 틈이 없어진다. 대학은 분명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계층적으로, 문화적으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 만나게 된다. 대학에서 지식을 체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 지난 4월부터 연세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학내 시위가 이어지자, 일부 대학생들이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연세대분회 제공
▶▶ 지난 4월부터 연세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학내 시위가 이어지자, 일부 대학생들이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연세대분회 제공

 

지식생산체제의 변화는 대학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급속하게 바꾸고 있다. 그는 지배계급이 구조화되면서 엘리트 과두제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는 더이상 새로운 세대와 사고가 등장할 틈이 없다. 그는 칼럼 지식인의 죽음, 때늦은 슬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 대학과 교수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종속됐다. 또는 스스로 지식권력의 일부가 됐다.’ 이 변화는 지식이 권력으로 작동하도록 했다. 지식인이자 엘리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대학은 이제 민중 지향적인 지식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학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2022년 지금, 대학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답을 구해야 한다. 대학은 학생의 것인가, 교수의 것인가, 법인과 국가의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 모두의 것인가.

 

Q. 대학은 어떤 공간이어야 하나.

A. 대학은 공공 인프라를 창출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은 사실 공공성이 상당히 강하다. 대부분 교육부의 지원을 받고 있어서다. 사립일지라도 일정 부분 공교육 내부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어떻게 하면 사립대학의 방대한 인프라에서 공공성을 살릴 수 있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가령 대학에 있는 실험실, 도서관을 비롯한 교육 인프라를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하는 방식을 고민해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대학이 본연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Q. 공공성의 관점에서 대학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인가.

A. 경쟁의 자리를 메우는 것은 협력의 가치다. 대학은 가장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지식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다양한 학생들이 대학에서 함께하며 만들어 낸 지식을 다시 주변으로, 지역사회로 환원해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가령 미국에서 장애인, 유색 인종 동료 학생과 기숙사 생활을 해 본 백인 학생의 경우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에 대한 관용도가 훨씬 높았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보고 섞여볼 때 새로운 세계를 체득할 수 있다. 그런 경험들이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상대화하고 서로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Q. 대학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나.

A. 세 견해가 있다. 첫째, 법적으로 소유권을 가진 사람이 대학의 주인이다. 법인이나 재단, 혹은 국가가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대학에 적을 둔 사람이 대학의 주인이다. 학생과 교수, 직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대학이라고 하는 제도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 모두가 대학의 주인이다. 대학 주변의 지역사회, 대학과 협업하는 수많은 주체 모두가 대학의 주인이다. 세 번째 견해에 따라 대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대학의 주인이 돼야 한다. 대학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다. 모두가 대학의 주인이 돼 대학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Q. 대학사회에 실종된 가치를 희구하는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젊은 학생들이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할 수 있도록 더욱 장려됐으면 한다. 다만 비판의 결론을 미리 내려두면 안 된다. 비판에는 어떠한 종류의 금기도 없어야 하며, 뿌리까지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은 비판의 대상뿐 아니라 비판의 주체에게도 위험한 것이다. 그 칼날이 스스로에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경험해봐야 한다. 뿌리까지 비판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 역시 그 구조에 이익을 얻고 있다는 감각을 체득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각자의 실존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테다. 가장 경계 없이 사유할 수 있는 지금, 학생들이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감히 알려고 드는 것. 그게 바로 계몽이다고 답했다. 그러니 감히 알려고 들고, 감히 비판해주시라. <시리즈 끝>

 

 

사회부 기획취재팀
chunchusocio@naver.com
글 박경민 기자
lightmiin@yonsei.ac.kr
복건우 기자 
geonu_20@yonsei.ac.kr

사진 서예원 기자 
harry214yw@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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