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민족’ 국가, 그 경계선 밖에 놓인 이들

 

같은 땅에 살지만 ‘한민족’이라는 강한 정체성 아래 늘 ‘깍두기’인 사람들이 있다. 이주 배경을 가진 이들에 대한 몰이해는 이들의 다양한 배경을 지운다. 한국에 정착해 가정을 꾸리는 다문화 1세, 조선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다시 한국에 온 고려인 3세, 그리고 외국인의 정체성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중도입국 자녀를 인터뷰해 이들의 삶의 궤적을 담아봤다.


다문화 1세,
한국에서 자라는 2세들을 바라보다

 

▶▶결혼 이주 여성인 나르기자씨는 우주베키스탄에서 대학 졸업 후 27살에 한국에 정착해 다문화 가정을 꾸렸다. 현재 수원시 외국인복지센터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상담을 담당하고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인 나르기자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 졸업 후 27살에 한국에 정착해 다문화 가정을 꾸렸다. 현재 수원시 외국인복지센터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상담을 담당하고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인 나르기자(45)씨와 안(44)씨는 10대 아이들을 키우며 다문화 가정을 꾸려나가는 중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니던 나르기자씨는 27살에 한국에 들어왔다. 입국 후 약 10년 동안은 일을 구하지 못했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단 한 번도 답이 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문화센터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후, 이주 여성들만 고용하는 다문화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수원시외국인복지센터에서 일하며 러시아어 통역과 상담을 담당하고 있다.

나르기자씨에게는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는 17살 딸이 있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전혀 다른 곳에서 아이를 키우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는 “교육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제일 어렵다”며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진로 상담을 위해 학교에 찾아갔더니 ‘외국인이시라 잘 모르세요’라고 했다”고 전했다. 다문화센터에서도 한국어 교육, 문화 프로그램 등을 주로 진행하다 보니 고등학교 진학과 관련해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나르기자씨는 “아이의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고 토로했다.

한 가정에 두 문화가 공존하기에 마주치는 어려움도 있다. 나르기자씨는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딸과 부딪히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슬람교를 믿는 나르기자씨와 딸의 여성관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아이의 생각이 너무 달라서 당황했다”며 “대화로 많이 풀어나가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심리상담이 필요할 것 같다”며 “두 가지의 다른 문화가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에서 미용사 일을 하던 안씨는 31살의 나이로 한국에 입국했다. 베트남에서 만난 한국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것이다. 수원시외국인복지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운 그는 이제 그곳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안씨는 “외국인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문제 해결을 돕는다”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안내해주고 심리상담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에게도 여전히 한국 생활엔 어려움이 따른다. 안씨에게는 각각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이 있다. 엄마로서 한국에 적응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한국의 직업과 생활, 문화 등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은 탓에 아이들의 교육에도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안씨는 “아이를 잘 키우려면 부모를 위한 교육이 꼭 필요하다”며 “지금은 그런 정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이유로 각종 학부모 모임에서도 소외당하기 일쑤다. 그는 “학부모 모임이 있다고 알고 있다”며 “다문화 아이들의 부모는 불러주지 않아 여태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국인이지만 다문화 2세이기도 한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크다. 안씨는 “아이들이 친구가 많지 않다”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훗날 군대에 가게 됐을 때 다문화 청년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을까 걱정이라고 전했다. 그는 “우리도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며 “어디서 왔냐, 언제 왔냐, 다문화 가정이냐 등을 묻지 말고 같은 한국 사람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두 뿌리를 가진 고려인 3세의 고민,
다른 문화 잇는 가교로 나아가다 

 

▶▶고려인 3세 최크리스티나씨는 언어와 교육에 대해 공부해 외국인이 당할 수 있는 차별과 편견에 맞선다. 한편 최씨는 국적 취득을 비롯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고려인 3세 최크리스티나씨는 언어와 교육에 대해 공부해 외국인이 당할 수 있는 차별과 편견에 맞선다. 한편 최씨는 국적 취득을 비롯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고려인 3세로, 한국외대 영어통번역학과에 재학 중인 최크리스티나(22)씨는 지난 2011년 만 11세의 나이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고려인은 구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동포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에 거주했지만,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쫓겨나듯 이주했다. 최씨의 증조부 역시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이후 우즈베키스탄에 뿌리를 내렸다. 

구소련 해체 이후 우즈베키스탄 경제가 악화하자 우즈베크어 대신 러시아어를 사용하던 최씨 가족은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최씨는 “우즈베크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대학 진학과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웠다”며 “건설 기능사였던 아버지 역시 임금을 지급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최씨의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한국에 입국했다. 1년 뒤 최씨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입국했고, 2011년 3월에는 최씨가 동생과 함께 입국하며 온 가족이 한국으로 이주했다. 1939년에 태어난 최씨의 외할아버지가 고려인 1세로 인정받아 최씨는 3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일산 지역 초등학교에 진학한 최씨는 당시 학교 최초의 외국인 학생이었다. 최씨는 “선생님들이 많이 당황했다”며 “우즈베키스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거나 우크라이나와 헷갈려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최씨는 낯선 문화와 언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최씨는 “처음에는 이주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지 몰랐기에 더 당황했다”며 “내가 너무 고생한다고 느낀 아버지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나는 힘들더라도 더 많은 기회가 있는 한국에 남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음악, 운동, 수학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아 여러 분야에 관심을 키울 수 있었고 더 도전해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언어에 관심을 키운 최씨는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가족이나 친척들 사이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이후 한국외대 영어통번역학부에 진학해 언어와 교육에 관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최씨를 비롯한 고려인은 정착 과정에서 여러 차별과 편견에 직면한다. 최씨는 “초등학교 때 사람들이 나를 두고 뒤에서 외국인이라며 수군댔던 기억이 있다”며 “갈등을 키우고 싶지 않아 애써 무시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어권 국가 출신이라고 하면 유학이나 공부 목적의 이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지만, 아시아권 국가 출신의 경우 단순 노동 혹은 결혼 이주로 일반화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편견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최씨는 “외국인이라는 편견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며 당시의 의지를 되돌아봤다.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기도 한다. 최씨는 “8살 때 내가 한국에 뿌리를 둔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정작 한국에 오니 사는 방식부터 성향까지 모든 것이 달라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인생의 절반을 각각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에서 보낸 최씨는 아직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 “두 나라 모두 나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다”며 “귀화를 하면 우즈베키스탄 국적을 포기해야 하므로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이주 배경 청년과 한국을 잇고 있다. 한국외대 국제학생회에서 활동하며 외국인을 위한 정보 제공과 다양한 행사를 통한 커뮤니티 활성화에 힘썼다. 용인시외국인복지센터 서포터즈로 활동하며 통·번역 업무를 맡기도 했다. 최씨는 “자라면서 혼자 부딪히며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며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준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꼈고, 지금까지 배운 것을 활용해 일한다는 것이 굉장히 뿌듯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와 이주민 사회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힐 필요성을 제기했다. 최씨는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며 “한국인은 외국인에 갖는 편견을 버리고 이주민 사회도 한국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인이지만 이방인입니다

 

서울장신대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인 소다빈(22)씨는 지난 2014년 캄보디아에서 우리나라로 온 중도입국 자녀다. 2006년, 어머니가 외국인 근로자 신분으로 입국한 뒤 아버지를 만나 재혼하면서 소씨를 포함한 3형제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다. 소씨 입국 당시만 하더라도 캄보디아인 중도입국 자녀는 거의 없던 터라 대사관에서 놀랄 정도였다.

소씨의 유년 시절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았기에 소씨 어머니는 이혼 후 한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었다. 소씨는 “한국에서의 소득이 캄보디아에서 번 것의 10배가량 된다”며 “어머니가 캄보디아로 보내준 돈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척 집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은 어린 소씨에게 큰 고난이었다. 그는 “삼촌과 이모의 집에 살며 사랑받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중학교 과정까지 끝내고 입국한 소씨는 한국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인종 차별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다문화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출신국별로 무리를 지어 어울렸고, 무리에 끼지 못한 아이를 따돌리곤 했다. 소씨는 “학교에 캄보디아 사람은 나 하나였기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교 밖에서도 따가운 시선이 잇따랐다. 소씨는 “가끔 뉴스에 혼혈아들이 차별받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냐”며 “그들은 한국인의 피가 반 섞였음에도 차별받는데, 외국인으로 살다가 중도입국한 우리는 오죽했겠냐”고 말했다.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눈만 봐도 차별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그의 동생도 아이들이 함께 놀아주지 않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씨는 부모가 맞벌이로 인해 한국 생활 적응에 크게 신경 써주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누군가 길을 알려줬다면 더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게 없어 이리저리 많이 부딪혔다”고 말했다.

새아빠와의 관계 형성도 쉽지 않다. 소씨는 “엄마는 우리를 한국으로 데려오고, 아빠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사업하기 위한 각자의 목적을 갖고 결혼했다고 느낀다”며 새아빠를 진정한 가족으로 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 고등학교에 다녔던 다른 중도입국 자녀들도 새아빠와 관계가 좋지 못한 것을 보며 본인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한국에 익숙해져 갈 때쯤 소씨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소씨는 “고등학생 때 한국어만 사용하다 보니 캄보디아어를 잊어버리게 되더라”며 “그런데 한국어도 잘하지 못하니까 ‘나는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진로 탐색 과정에서 혼란했던 마음이 정리됐다. 취업을 목표로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며 설비와 용접을 배웠던 소씨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에 재수를 했다. 그 과정에서 사회복지학과 진학을 결심했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중도입국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힘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캄보디아인’으로 인식한다. 귀화해서 한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적도 다시 취득해 이중 국적자로 살아가고자 한다. 소씨는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캄보디아인으로서 한국에 사는 외국인, 중도입국 자녀 등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학생 신분인 지금도 그는 외국인에게 친화적인 한국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다. 심리상담을 배워 외국인 노동자들의 말 상대가 돼주기도 하고, 이주노동재단에서 캄보디아어 통·번역 일도 하며 많은 캄보디아인의 입과 귀가 돼주고 있다. 소씨는 “한국에 처음 입국했을 때 갔던 다문화 센터의 선생님들이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게 느껴져 정서적으로 많이 의지했다”며 “나도 ‘직업’이라 의무적으로 외국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끝으로 소씨는 “한국에 중도입국 자녀가 생각보다 많고 이들은 외롭다”며 “누구라도 ‘잘 지내고 있어? 힘들지는 않니?’라고 물으며 아이들을 다독일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명의 인터뷰이는 각자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한국 정착 과정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언어의 장벽은 높았고, 문화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는 이들처럼 외국에서 들어와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동안 경계선 밖에 놓여 한국 사회에서 소외됐던 이들, 이제는 이들의 삶에 주목할 때다.
 

 

글 정희원 기자
bodo_dambi@yonsei.ac.kr
방성은 기자
bodo_idol@yonsei.ac.kr
여근호 기자
khyeo1123@yonsei.ac.kr

사진 김지훤 기자
kimzlight@yonsei.ac.kr
허유신 기자
yushin0626@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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