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걸까? 다섯 번이나 만났는데도 나는 아직 그녀를 사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망설이고 있다. 연애를 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연애라면 소주 뚜껑을 비틀어 따는 것보다도 더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자신 없어 하고 있다. 이제껏 나는 연애를 쉽게 해왔다. 쉽게 만나고, 쉽게 자고, 쉽게 헤어지고. 나는 바람둥이는 아니었지만, 여자가 아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이런 관계에 만족해하다가 적당한 여자를 골라서 결혼을 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첫사랑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첫사랑이 없다. 내가 좋아한 사람도, 나를 좋아해준 사람도 몇 명이나 있었지만, 서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진 적은 아직 없다. 너무 감상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을 하고 싶다. 섹스가 목적이 아닌 관계를 갖고 싶다. 나는 내 옆에 앉아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섹스가 목적인지, 사랑이 목적인지.


   
2.  달이 참 밝다. 공원 길가에 심어져있는 나무들 사이로 보름달이 환하게 땅을 비추고 있다. 사방은 조용하고, 날씨는 선선하다. 내 뱃속에도 그녀의 뱃속에도 맥주가 한 캔씩 들어있고, 벤치 옆에 놓인 검은 비닐봉투에는 아직 두 개의 시원한 캔맥주가 남아있다. 하루 종일 즐거운 데이트를 한 끝이며, 헤어지기까지 약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사귀자는 말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어떻게 할까?”


 ‘사귀자’, 나 ‘좋아한다’, 가 아니다. ‘어떻게 할까’, 이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묻고 말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질문은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적의 질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나의 우유부단함을 저주했다.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연애풍조를 저주했다. 감히 그러한 연애풍조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무모한 나를 저주했다.


 “어떻게 할까, 라뇨?”


 그녀가 반문했다.


 “이대로 계속 만날 순 없잖아. 난 이제 우리가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

 “무슨 결정?”


 오늘 그녀의 주무기는 백치미인 것 같다. 나는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사귀든가 말든가, 어떻게든 결정을 해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어.”

 “왜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질문들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녀는 늘 이런 식으로 내가 내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을 때까지 질문을 계속한다. 마치 고해를 받는 신부처럼. 


 “질질 끄는 건 질색이야. 사귈 거라면 빨리 사귀고, 안 될 거라면 빨리 그만두고 싶어. 그렇게 빨리 결정을 해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내 연애가 모두 그렇게 백일도 못 채우고 단명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계속 미뤄왔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어.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다간 아무 것도 못 할 것 같아. 지금 결정을 내리자. 어떻게 할까? 사귈까 말까?”

 “오빠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봤어.”


 그녀는 손에 든 맥주를 한 잔 마셨다.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응?”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냐구요. 나하고 사귀고 싶어요? 그런 걸 말해줘야죠. 나하고 사귀고 싶은지 아닌지 그런 건 오빠가 결정해야지,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건 이상하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3. 자기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논리로 엮여있는 지를 알아차리지 못 한다. 나는 내 감정을 남에게 묻고 있다. 멍청하다. 이렇게 멍청할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사귄다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 나는 사귄다는 의미를 내 멋대로 뒤죽박죽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혼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귀고 싶어. 미친 듯이, 는 아니지만 좋아해. 널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다, 라니. 이런 프로포즈는 들어보지도 못 했다. 나는 나를 비웃지 않는 그녀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사귀자고 할 때도 그렇게 말해요?”

 “아니. 보통은 미친 듯이 사랑해, 라고 말하지.”

 “그런데 나한테는 왜 그렇게 말해요?”

 “너한테는 솔직하고 싶으니까. 거짓말로 시작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 솔직한 게 더 맘에 들었는데.......”


 그녀는 나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확실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안 솔직한 게 더 맘에 든다니까 그러네.......”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달빛 속에 비친 그녀는 캔맥주의 여신 같았다.

 “그래도 나는 솔직히 말할래. 아마도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아. 그것도 아주 깊이.”


 나는 내 손에 들린 맥주를 깊이 한 모금 마셨다. 맥주캔을 입에서 떼어내자, 내 입에 다른 것이 와서 부딪혔다. 입술을 붙인 채로 그녀가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사랑해봐요. 아주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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