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보는 것은 내 오래된 취미 중 하나다.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없으면 혼자 거울 앞에 한동안 앉아 있곤 한다. 그리고 길을 걸어갈 때도 나를 비춰볼 것이 내 앞에 있으면, 그 짧은 찰나에도 나는 내 모습을 세심히 관찰한다. 어릴 때부터 해오던 버릇이라서 이제는 ‘취미’라고 스스로 이름붙이고 있는 이 ‘거울보기’는, 같은 거울 앞에 같은 얼굴이라 하더라도 매일매일 색다르다. 그리고 내가 통과해왔던 굵직굵직한 시간들에 따라서도 내가 거울을 보아왔던 이유와 느낌들은 변해왔다.

아주 어릴 때는 호기심만으로도 충분히 거울 앞에 설 이유가 있었다. 신기하니까. 하지만 내가 학교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맺음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단순한 호기심만을 가지고 거울을 바라볼 수 없었다. 사람들과 있을 때 내 눈은 다른 사람들만을 비추기 때문에 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거울 앞으로 가야했다. 다만 혼자 있을 때. 그 때가 되면 나는 나의 생김새와 옷차림을 매우 세밀하게 관찰했다. 누군가와 다투고 나서도, 누군가와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누군가 때문에 슬펐을 때도, 등등등. 그리고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고 월경을 시작한 후부터는 더더욱 자주.

그렇게 내가 아직 ‘자라고’ 있을 때 거울 앞에서 꽤나 많이 생각했던 모습은 20살이 된, 즉 ‘다 큰 여성’이었다. 물론 그 때는 그렇게 상상하는 모습 속에 ‘여성’이라는 것을 굳이 염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당연하므로. 그리고 그 모습은 매우 잘 떠올려볼 수 있었다. 미래에 어떤 화장을 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투를 쓰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에 대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매우 다양하다고 생각했었다. 당장 거울에 비춰진 나를 앞에 두고 시간이 흐른 뒤 비춰질 내 모습과 비교를 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 나는 20살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요즘엔 거울을 볼 때, 20살을 ‘다 큰 여성’이라고 생각했던 게 떠올라서 멋쩍은 웃음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이전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그리고 사실, 이전에 다양하다고 생각했던 선택지들마저도 과연 진실로 그러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거울 속에서 30, 40대의 여성을 매우 자주 그려본다. 얼굴생김새든, 옷차림이든, 말투든, 표정이든.

영화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에서 많은 중년의 여배우들은 이렇게 말한다.
 
“We need characters."

맥락이 삭제된 스틸 컷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힘을 가진 여성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도 그렇다. tv든, 영화든, 무엇이든 이 사회를 재현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여성의 캐릭터가 얼마나 한정적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말은 내가 되고자 하는, 혹은 될 수 있는 여성상에 대한 상상력이 매우 빈곤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사회에 다양한 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없으니까, 재현물 속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거지.” 매우 맞는 말이다. 재현물 속에 20대의 젊은 여성은 흘러넘치고 있다. 예쁜 옷을 입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사라진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그녀들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 또한 20대가 지나고, 어딘가에서 늙어가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성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쉬이 망각하곤 한다. 나 또한 매우 그러했으니까.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제약 받는 것 정도는, 나의 능력만으로도 쉽게 넘겨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좌절과 두려움은 생각보다 매우 컸다. 이 빛나는 20대가 지나가고 나면 어떻게 살아갈지 먹먹해질 때가 찾아온다.

그러나 나는 내 거울을 깨지 않을 참이다. 되려,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는 내가 망각해왔던, 혹은 망각하려했던 ‘여성’이라는 사실과 직면하기로 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거울 앞에서 오랫동안 내 중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지금 나에게 다양한 여성의 캐릭터들이 주어져 있지 않지만, 페미니즘은 그 부재함에 대한 좌절을 새로이 만들어갈 필요와 즐거움으로 만들어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매일 내 거울 앞에서 중년의 여성을 그려본다. 30, 40대의 내 모습. (50대 이후로는 좀 힘들다;;) 그리고 나는 지난 호에 초생이 썼던 「독신」을 보면서 매우 공감했고 새삼 행복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마흔 살이 되면 어딜 가볼까?

/고래 - 내 안에 차오르는 여성주의 물결 움ㆍ펼ㆍ틈 17대 총여학생회

데브라윙거를 찾아서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Searching for Debra Winger)

    7회 여성영화제 상영작

    미국/ 2002/ 97분/ Beta/ 다큐멘터리

    감독 | 로잔나 아퀘트


    여성의 일과 결혼, 그리고 나이 듦의 편견에 대항하며 고군분투하는 여배우들의 솔직담백한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는 40대 초반에 은퇴선언을 하고 은둔할 수밖에 없었던 배우 데브라 윙거를 찾아나서는 동시에 일정한 연령이 되면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영화 안에서 독립적인 캐릭터로 존재하지 못하고 누구의 엄마 내지는 이모, 숙모로 전락하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씁쓸한 현실을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그랑 블루>, <뉴욕 스토리>, <수잔을 찾아서> 등에 출연하여 뚜렷한 주관과 깊이를 지닌 배우로 평가받고 있는 감독 로잔나 아퀘트는 연기자라는 특수한 직업을 가진 여배우들이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면하는 여러 가지 유혹과 어려움, 그리고 사생활과 성공적인 배우생활의 조화로운 유지 등을 수많은 배우들-제인 폰다, 우피 골드버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홀리 헌터, 샤론 스톤, 기네스 팰트로, 맥 라이언, 다이안 레인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거침없이 카메라에 담아낸다. 아직도 여배우를 연기력보다는 섹스 어필 능력이나 외모, 그리고 젊음으로 평가하는 할리우드 풍토에서 배우로서의 자긍심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여배우들의 고난과 시련을 유쾌, 통쾌, 상쾌하게 따라잡은 서울여성영화제를 위한 다큐멘터리. (임성민)


     출처: 서울여성영화제 공식홈페이지 http://www.wffi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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