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다, ...은 미흡하다, ...은 현재 추구하고 있는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전체적으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태클’로 가득찬 문체는 도대체 누구의 문체일까.

  유감스럽게도 내 기사(기획취재 기사)에는 저러한 문체들이 쓰인다. 눈에 불을 켜고 문제점만을 찾아야 하는 기획취재부 기자의 숙명이랄까. 너무 거창한가(?)

  사실 나는 그냥 기획취재가 좋았다. 신문을 보더라도 단순 보도기사는 읽기 지루해 했으니까.. 사안의 새로운 단면을 제시하고 가려져 있던 문제점을 ‘까발리는’ 기사, 누구도 문제라 생각지 않았던 부분에서 놀랍게도 속속들이 문제점을 찾아내는 기사들. 이러한 기사들은 나에게 기사가 아닌 ‘예술’로 다가왔다. 나도 이러한 ‘예술’적인 기사를 쓸 수 있을까?

  흔히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문제의식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모두에게 칭찬받는 사건도 조금 다른 시각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첫 취재라서 미숙하기 그지없는 나의 취재에도 ‘제 소관이 아닙니다’, ‘확답을 드리긴 힘들겠군요’, ‘이렇게 써 주셔야지, 이게 진실인데’처럼  ‘몸사리기’에 급급한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문제를 얻어내기 위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들이대기’도 필수이다.

   어쨌든 기자의 소양이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평소에 어떤 글을 쓸 때도 이러한 특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신이 느끼고 감동받은 점을 얘기하는 서평에서조차 비판으로만 도배돼 있음을 문득 깨달을 때, 평소 어떤 사건도 삐딱해 보이고 마치 ‘착한 사람만 보이는 옷’과는 반대로 ‘나 같은 사람’만 보이는 듯이 문제점만 보일 때,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감동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태클’만 거냐는 빈정거림을 들을 때!!! 이러한 특성들은  ‘한국사람들은 남 잘되는 것을 못 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속담에서 집중포격을 받는다. 분명히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님에도 왠지 찔리는 말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말하는 ‘가시’처럼 느껴지는 것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을 내 내면에 바꿔 적용하는 것은 내 춘추생활의 첫 번째 과제로 주어진 것 같다.

‘나는 남 못되는 것을 못 본다’, ‘어딘가에 문제가 있을 때 왠지 배가 아프다’.

  여담이지만(일기에 여담이라는 어휘는 왠지 어색하다) 내 글쓰는 스타일도 교정대상 1순위이다. 편하게 글을 풀어가는 에세이를 너무도 좋아하는 나. 웬만하면 어휘로 문장을 끝내는 나에게 ‘다’로 끝나는 기사체는 답답한 느낌을 준다. 그 외에도 항상 기사의 분량을 신경써 가며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는 것도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에세이스러운 내 문체가 기사를 ‘리라이트’하시고 고쳐주시는 부장님의 수고를 두 배로 만들었다는 점, 이 자리를 빌어 시인하고 우리 나은정 부장님께 심심한 사과를 드리고 싶다. 진짜 사과를 책상에 올려둘까? 아, 지금 손에 쥔 짱돌은 그만 내려놔 주었으면..

  최소 3학기 이상의 춘추생활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미지수다.  카오스이론에서 나타나듯 비선형방정식의 미세한 초기값의 차이가 상상도 못할 결과를 내는 것처럼,  춘추를 함으로써 나는 내 인생의 초기값에 미세한 조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는,

과연 어디에 태풍이 몰아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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