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몸은 한국을 떠나지만, 한국 그리고 연세와의 인연은 계속될 것입니다.”


약 1백19년간 지속된 언더우드가(家)의 한국사랑. 원두우 박사, 원한경 박사, 원일한 박사에 이어 한국사랑을 실천해왔던 원한광 박사와 그의 가족이 이달 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끝과 시작이라는 새로운 기점에 서 있는 원박사. 35년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느라 매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원박사는 한국을 떠나는 것에 대해 “섭섭하죠. 그러나 새로운 출발에 설레기도 해요”라며, 그런 자신의 마음을 “마치 대학 입학을 앞둔 고3 같다”고 비유했다. 원박사와 한국의 인연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됐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원두우 박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이래, 대를 거듭한 언더우드가의 한국사랑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원박사 역시 세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신 한국으로 건너왔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한국생활, 그리고 이곳에서 펼쳐진 그의 선조들의 업적은 원박사가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줬다. 그는 “물론 아버지가 나에게 한번도 한국에 대한 의무를 강요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 이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고민으로 가득했던 원박사는 한국에서 서울외국인학교까지 마친 뒤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군생활, 교수생활을 거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원박사는 “이를 통해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얻었고, 나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기로 했다”며, “이 결심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기뻐하시더라. 아들이 부담스러워할까봐 말은 안하셨지만 은근히 바라셨던 것 같다”고 웃었다.


스스로 선대의 뜻을 받들어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나간 원박사는 우리대학교 교수, 재단이사, 한미교육위원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때그때 힘든 일들이야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잘 기억이 안나더라”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굳이 꼽으라면 한글 글쓰기”라고 답했다. 일명 ‘선교사의 문맹아이들’로 불리는 어려움으로, 외국에서 거주하는 선교사의 자녀들이 듣기나 말하기는 생활 속에서 유창해지지만, 작문 실력은 키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글 글쓰기가 어렵다는 그는 “하지만 내가 원하던대로 한국에 와 언더우드가의 후손으로서, 교육자로서 나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것, 이야말로 복이 아니겠느냐”며, 그동안의 한국 생활을 긍정적으로 떠올렸다. 원박사는 “특히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만나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뻤다”며, 우리대학교 교수생활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원박사는 “무엇보다 증조할아버지가 처음에 기대하셨던 바가 다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원두우 박사가 처음 한국에 발을 내딛었을 때 목표한 것은 ‘기독교 전파, 의료 사업, 현대식 교육, 한국의 경제개발’이었다. 그는 “모든 일에 ‘날이라고 부를 단계는 없지만 대부분 다 잘 이뤄졌다”며, “우리 언더우드 가족이 한국에서 더 이상 할 일은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또한 외국에 있는 자녀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도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박사는 “이제 집은 미국에 있겠지만 한국에 자주 방문할 것”이라며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을 것임을 덧붙였다. 그는 “언론에서 우리 가족이 한국을 영원히 떠나는 것처럼 과장 표현해 매우 섭섭하다”며, “제발 그렇게 생각치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이 35년간 머물렀던 한국 그리고 연세 사회에 대해 던지는 따뜻한 한마디에서도 그의 한국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외국인인 내가 보았을 때’ 한국 사회는 많이 발전했으며 이 시대의 조류인 국제화에도 잘 따라가고 있지만, 그것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외국에 나가기만 하지 말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한국을 잘 알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한편 “한 지인으로부터 연세대의 기독교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들었다”는 그는 “학생들이 연세가 설립될 때 기본 바탕이 됐던 기독교적 정신을 함양해 ‘사회에 봉사하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에 대해 끝까지 관심을 아끼지 않던 원박사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는 “외국에서 나만큼 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드문 만큼, 미국에서 한국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정하진 않았지만 하나님이 잘 인도해 주실 것”이라며 미소짓는 그의 모습에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지난 보름간 한반도의 곳곳을 여행했다고 한다. “동해, 통일전망대, 울릉도, 안동, 전주, 광주 등 전국을 돌았어요. 아름다운 한반도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선대까지 깊은 인연이 있었던 한국, 그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생활을 준비하는 원박사. 그의 가족들이 한국이란 낯선 땅에서 위대한 사랑을 꽃피워냈던 모습이 곧 마주할 새 땅에서도 재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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