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찬우 보도부장(글창융경제/데사·21)
육찬우 보도부장(글창융경제/데사·21)

 

고등학교 시절 내겐 ‘정민석’(가명)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민석이는 축구와 역사를 좋아해 관련 지식이 해박했다. 관심사가 겹쳤던 나는 민석이와 여러 주제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민석이는 목표하는 대학이 있었다. 그러나 민석이는 관심사인 사회 과목 말고는 성적이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다. 아마 그 성적으로 목표하는 대학에 가려면 기숙학원에서 제법 고생해야 할 터였다. 그럼에도 민석이는 목표하던 좋은 대학에 한 번에 합격했다. 
민석이의 대학 합격 소식이 알려진 후, 반 친구가 갑자기 내게 와 민석이에 대한 험담을 쏟아냈다.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도 붙을까 말까 하는 대학을 민석이는 쉽게 붙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그 말을 민석이 들으라는 듯이 한참을 떠들다 자리로 돌아갔다. 민석이에게 괜찮냐고 물었더니 이미 많이 들은 말이라 익숙하다고 답했다. 민석이는 신체 일부가 불편해 전동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친구였다. 
대학의 장애인 정원 외 입학에 대한 반 친구의 의견처럼, 언제부터인가 소수자 우대 정책에 ‘불공정’과 ‘비효율’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결과물을 가져가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
‘공정’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누군가는 공정을 결과적 평등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기회의 평등이라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유는 청년들 스스로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무한 경쟁’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공정은 분배 정의 실현에 있지 않다. 그것은 기회의 평등, 즉 무한경쟁 사회의 완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와의 공생 문제를 놓고도 기회의 평등에 따른 ‘공정’한 경쟁이 이뤄졌는지 그 여부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청년들이 주장하는 ‘공정’은 시장의 분배 결과를 두고 경쟁할 자유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청년들은 무한 경쟁을 내재화해 경쟁을 통한 결과만이 공정이라 학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년들이 강조하는 경쟁할 자유 말고도 소수자가 인간답게 살 자유 등 다른 여러 차원의 자유가 있다. 경쟁할 자유 이외 다른 차원의 자유를 부정하는 행태는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유는 만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짐으로써 진정한 자유가 된다. 반면 일부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는 특권일 뿐이다. 그러니 청년들이 말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 보기는 어렵다.
현대사회는 상위 1%가 전 세계 부의 절반가량을 독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 앞서 말한 무한 경쟁으로서의 ‘공정’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공동체를 좀먹는 일일 것이고, 이는 곧 공동체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예컨대 비슷한 경제적 지위라도 누가 배려 대상자가 되는지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몫이 줄어들지는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나아가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적극적 우대 정책이 ‘역차별’이라며 반대하고, 이를 통해 무한 경쟁이야말로 진정한 공정이라고 맹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정한 공정 사회는 자유가 특권이 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시장의 자유를 넘어서, 다양한 차원의 자유가 공존하고 존중받아야 비로소 공정한 공동체가 실현된다. 이러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에 복지나 사회부조 등의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우리의 삶을 진정한 자유와 가깝게 만들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무한 경쟁의 공정이라는 기만적 담론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가치를 되찾게 될 것이다. 

얼마 전 민석이에게 연락했을 때, 민석이는 지금 훌륭한 지도교수 밑에서 석사과정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멋지다 정민석.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