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진 총무국장(독문/언홍영·21)
장호진 총무국장(독문/언홍영·21)

 

할아버지께서 한 카페에 취직하셨다며 빙수 먹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던 날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한라산쯤은 성큼성큼 뛰어서도 올라가시고, 칠순이 넘은 연세에도 커다란 알통을 자랑하시는 분이었다. 체력도 체격도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 할아버지였던 지라 할아버지께서 사회인으로 역할하기를 그토록 바라셨다는 것을 그날에서야 알게 됐다. 손녀딸이 일터에 찾아오면 빙수 한 그릇 멋지게 만들어 내어주겠다는 마음이 담긴 그 환한 웃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작년 이맘때쯤 생각보다 너무 이르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올해 1월 1일엔 할아버지가 계신 수목장에 갔다. 수목장 입구에 위치한 카페가 할아버지께서 연거푸 자랑하시던 그 카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이 방문할 법한 수목장의 신년 첫날, 카페의 불은 깜깜하게 꺼져 있었다. 문에 붙어 있는 종이를 보고 노인 복지 사업, 즉 실버 카페를 위한 예산이 끊겨 운영이 잠정 중단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일은 지하철 노후 전동차 교체 사업이 한창이었을 때 느꼈던 씁쓸함을 상기시켰다. 수습기자 시절, 취재 차 창동역에서 1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을 지나 탑골공원에 갔다. 탑골공원에서 두 명의 노인을 만났다. 당시 연세로 95세셨던 최영욱 할아버지는 “다른 노인들과 대화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갈 데가 없으니 여길 오는가 보다”라 짐작할 뿐이었다. 노인들의 커뮤니티는 예상과 달리 침묵이 가득했다. 노인들은 띄엄띄엄 앉아 서로의 외로움에 동병상련을 느끼고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동갑이셨던 77세 박문서 할아버지는 서대문구에 살아 3호선과 6호선을 자주 이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3‧6호선 라인에 사는 그가 자주 가는 곳은 1호선 서울역, 종로3가역, 청량리역. 무료 급식소가 주로 있는 1호선을 따라 사람 구경하는 재미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노인들의 일상은 가장 오래된 지하철, 1호선을 맴돌았다.

노인들은 사회의 눈초리를 받지 않고 모여 있을 수 있는 공간에 가려고 1호선을 탔다. 그래서 1호선엔 노인이 많다. 무임승차 제도와 맞물려 1호선은 그야말로 ‘적자’ 노선이 됐다. 이것이 문제였다. 1호선의 노후화 상태가 가장 심각하다는 사실이 공공연했지만, 전동차 교체 사업에 있어서 1호선은 경제인구가 가장 많이 타는 ‘효자’ 노선 2호선보다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악취가 나고, 낡았다며 악명 높은 1호선은 우리 사회의 ‘외면 순환선’이었다.

세간에는 무임승차 제도를 두고 노인들이 목적지로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복지 혜택일지는 모르겠으나, 노인들이 목적지 없이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열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목소리도 있다. 열차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 제도를 악용하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말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긴 이동시간을 일컬어 ‘길에다 버리는 시간’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노인들은 목적지도 없이 지하철을 타 사람 구경이라도 해야 하루가 흘러가는 것이다. 두 시간 남짓의 취재 후에 내 시선 끝에 걸린 것은 노인들의 지독한 외로움과 사회의 편견 어린 외면이었다.

나이가 들면 삶이 지루해질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삶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목적지조차 없이 외출하던 1호선의 노인들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호흡하는 삶을 여전히 열망하고 있었다. 남은 삶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자 하는 노인들의 욕구에 우리 사회의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무르길 바란다. 그 시선이 노인의 시선과 맞닿아 노인의 삶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음이 증명되길 바란다. 얼굴이 주름진들, 그 마음까지 주름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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