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예진(경영/생디·20)
나예진(경영/생디·20)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비를 혐오한다. 바비가 가부장제와 외모지상주의를 답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모순적이다. 바비의 제작자들은 여성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을 소녀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바비’라는 캐릭터를 기획했다. 왕자의 도움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디즈니 공주들과는 다르게, 바비 영화 시리즈에서 바비는 언제나 자신만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간다. 철저히 여성 중심적인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고 남자와의 사랑보다는 정의를 우선시한다. 바비의 예쁜 외모는 유혹의 수단이 아닌 자기관리의 결과다.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바비’에서도 이러한 괴리가 잘 드러난다. 바비의 제작사 마텔(Mattel)사의 매출과 주가는 지속적으로 하향세를 보인다. 마텔은 다양한 모습의 바비 인형을 만들어 바비가 여성 인권을 퇴보시킨다는 편견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소비자에게 닿지 않는다. 바비랜드에 살던 바비는 자신이 현실 세계에서 환영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바비가 캐릭터로서 실패하고, 반(反)페미니즘의 상징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적인 문제는 세계관에 있다. 바비랜드에는 노력이라는 개념이 없다. 바비랜드는 꿈과 희망으로만 가득하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바비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은 채 즉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아주 쉽게 조력자의 도움을 받고 작전들을 실수 없이 성공시킨다. 바비랜드에서는 물리적으로도 영원한 삶을 살며, 세대 변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데 집중하면 된다. 그렇기에 언제나 웃을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현실 세계로 간 바비와 켄은 노력 없이 결과만을 얻으려 행동한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가게의 옷을 가져가며, 학위와 자격증 없이 직업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바비랜드와 인간 세계는 달랐다. 바비와 켄은 수없이 거부당하고 경찰에 연행된다. 바비는 이러한 현실 세계를 마주하며 인간의 본질을 배워간다.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겪는다. 목표를 위해 힘차게 달리다가도 수없이 자신을 의심한다. 때로는 깊은 우울감에 매몰돼 시간을 허비하고 타인을 증오한다.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비는 자신의 사명을 찾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바비는 눈물을 흘리고, 무기력증에 빠지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이를 극복하면서 인간이 된다. 

나는 영화를 보며 바비가 인간이 되는 과정과 대학생활이 참 닮아있다고 느꼈다. 나도 학창 시절에는 환상 속에서 살았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들을 자랑하며 모든 것에 오만한 태도로 임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행복한 일상과 해피엔딩에 안주했다. 노력 없는 결과에 취해 스스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일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이는 어려운 환경에서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누군가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다. 인간관계 문제를 겪어보니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와 다르게 내 편이 아닌 사람이 대다수였다. 진로 고민 없이 기계적으로 공부만 하던 나 자신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뒤처지고 있음을 발견했고, 노력 없이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세대가 바뀌어 가는 것을 체감하며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도 던져봤다.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실은 결코 바비랜드가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넘어지기에, 그럼에도 노력하기에 우리는 살아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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