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 유동기 기자(사회·19)
사회부 유동기 기자(사회·19)

 

처음 당구장에 간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첫 면도로 인해 아직 아린 피부와 그 피부에 닿는 당구장의 아른한 담배 연기는, 마치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아저씨 무리를 피해서 가장 구석에 자리 잡았다. 난생처음 잡아보는 큐대를 제멋대로 들고, 우리끼리만의 규칙을 정해 점수를 계산했다. 짜장면의 고소함과 담배의 씁쓸함, 아저씨들의 피곤함과 우리들의 천진함이 얽혀있었다. 그리고 그곳 천장에는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 커다란 팻말 하나가 달려있다. 새빨갛고 굵은 궁서체의, 300 이하는 맛세이 금지.

‘맛세이’는 당구 기술 중 찍어치기의 프랑스어 표현이다. 당구 경기 중엔 내가 쳐야 할 공과 맞춰야 할 공이 애매하게 붙어 일반적인 자세로는 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맛세이는 그럴 때 이용하는 기술이다. 당구 큐대를 당구대와 수직으로 높이 세우고, 손목 힘으로 미세하게 깎으며 내리친다. 성공한다면 역전의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맛세이는 당구장 사장님이 가장 싫어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자주 당구대가 찍혀 손상되기 때문이다. 당구대 가격은 1백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넘기에 수리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결국 전국의 당구장 사장님은 한숨을 쉬며 천장에 팻말을 단다. 300 이하는 맛세이 금지.

그래서 그 팻말 밑에서 ‘맛세이를 한다’는 건 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표면적으론 자신의 점수가 300점을 넘는다는 것을 당구장 속 익명의 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자신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고수’라는 의미며, 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같은 공간에서 당구를 치고 있는 이들에게 던지는 자기 확신의 선포랄까. 그래서 ‘300 이하 맛세이 금지’ 밑에서 맛세이 찍는 아저씨는 튀어나온 뱃살과는 별개로 제법 폼난다. 언젠간 나도 그 팻말 밑에서 폼나게 맛세이를 성공시키는 상상에 잠기곤 한다. 

많은 스포츠 선수는 자신의 주 종목이 ‘꼭 우리네 삶과 같다’고 말한다. 성공적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모 야구 중계해설자도, 프로에서 얼마 전에 은퇴한 골프 선수도 ‘그것은 인생이다’는 등식을 입에 달고 산다.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스포츠에서 배운 그 깨달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관통한 어떤 진리라 느꼈으리라. 같은 맥락에서 당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실패를 겪으며 경험을 쌓는다. 경험을 통해 자신이 속한 필드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주위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내 의견이 관철되길 바란다. 팻말 밑, 얼굴엔 주름이 자글한 그 아저씨가 떠오른다.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그 주름은 당구 구력(球歷)을 가늠케 한다. 우리는 어쩌면 팻말 밑에서 자신 있게 맛세이를 하기 위해 오늘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친구와 나는 아직 50점 득점을 목표로 당구를 친다. 한 게임에 300점을 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고수들에 비하면 매우 초보인 셈이다. 우리대학교 국제캠 지하에서 치던 4년 전에 비해서도 발전은 없다. 그래도 요즘엔 애매하게 붙어 있는 당구공을 보면 도전하고픈 욕구를 참을 수가 없다. 사장님 눈치를 한번 보고, 머리 위 팻말을 올려다본다. 사장님이 TV 속에 빠져든 지금, 살금살금 큐대를 수직으로 쳐든다. 숨을 한번 후 내쉬고, 잠시 정상에서 멈춘다. 하나, 둘, 셋, ‘찍’는다. 탁, 탁, 실패. 

다행히 당구대는 무사하다. 우리는 멋쩍게 웃는다. 사장님은 여전히 TV 속이다. 50점의 맛세이도, 삶이 아닐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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