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부 강하영 기자(국제관계·21)
매거진부 강하영 기자(국제관계·21)

 

지난 2022년 9월, 나는 취재를 위해 청년의 날 축제 현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난 청년들은 열정, 패기, 희망, 도전 등의 단어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나에게 청년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날의 이미지는 내가 그려낸 것에 불과할 뿐, 현실은 더 어두웠다.

청년의 날 축제 이후 몇 번의 취재를 거치면서 나는 사회에서 소외된, 더 나아가 고립된 청년들을 만났다. 내가 지금까지 구멍 뚫린 고깔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고깔을 벗고 보니, 그제야 나의 시선 너머의 청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 고립된 청년들 말이다. 

3개월 이상 타인과 접촉하지 않고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와 분리된 청년들을 우리는 ‘고립 청년’이라고 칭한다. 지난 1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만 19~34세 청년 중 고립 청년의 비율은 5.0%다. 우리나라 청년의 인구가 1천 77만 6천 명임을 고려했을 때, 고립 청년의 수는 약 53만 8천 명에 달하는 것이다. 

청년시절은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시기다. 이 시기에 고립을 선택한 청년은 점차 사회성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고립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남은 생애도 고립 중년, 고립 노년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청년 시기의 고립은 그 어느 시기보다 더욱 치명적이다.

취업의 실패,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 그들이 고립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아우르는 접점은 하나다. 바로 ‘두려움’이다. 경쟁주의 사회는 청년들의 두려움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낙오자로 낙인된다. 낙인은 무거운 돌덩이가 돼 그 청년이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짓누른다. 성과주의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에는 성공과 실패, 두 가지의 갈림길이 이분법적으로 존재한다. 과정은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실패를 맛본 청년은 도전보다 고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승리 다음으로 좋은 것은 패배다.
어쨌든 당신은 시합에 참가했으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매번 승리할 수 없듯이, 매번 패배할 수도 없다. 승리자와 패배자는 정해져 있지 않다. 한 번의 패배로 좌절할 필요는 없다. 한 번의 승리로 자만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항상 고립 청년이 될 위기에 놓여 있다. 고립은 특별한 청년들만의 선택지가 아니다. 고립 청년 중 대부분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이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고립되지 않을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시합에 함께 도전한 참가자들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두려움에 멈추지 않고 인생이라는 시합의 결승선을 건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혼자서 완주하기 힘들다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다. 청년 한 명 한 명이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사회로 나아갈 때 우리는 경쟁주의와 성과주의의 사회 속에서 고립을 피할 수 있다. 

푸른 나이, 청년(靑年). 청년의 때는 인생에서 가장 푸른 시기다. 그러나 고립 청년들에게는 이 시기가 가장 어둡게 기억된다. 이들이 방문을 열고 나와 ‘고립’이 아닌 ‘도전’을 선택할 수 있게끔 우리 사회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청년 담론을 논하는 기자로서 모든 청년이 푸르게 빛날 그날을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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