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훈 사회부장(불문·22)
김병훈 사회부장(불문·22)

 

제작이 없는 날에도, 나는 연세춘추 편집국을 찾곤 한다. 넓고 조용해 할 일을 하기도 좋고 무엇보다 항상 북적이던 공간을 감싸고 도는 공허함이 좋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무도 없는 편집국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었다. 기승하는 꽃가루 때문에 복용한 알레르기약의 영향인지, 봄바람과 함께 졸음이 몰려왔다. 잠시 후, 유리문 열리는 소리가 나른한 정적을 깨뜨렸다.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함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한 분이 편집국으로 들어오셨다. 스스로를 ‘동인’(연세춘추/대학언론사의 졸업생)이라고 밝힌 그는 1967년 지면에 실린 본인의 영어 기사를 찾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무려 50년도 지난 기사를 찾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기사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빠를 것 같아 곧바로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에는 1950년대부터 발행된 연세춘추의 모든 지면을 모아둔 거대한 책들이 빽빽이 꽂혀있었다. 3학기째 기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연세춘추의 역사였다. 동인분과 함께 1967년의 모든 지면을 뒤졌지만, 원하는 기사를 찾진 못했다. 애초에 연세춘추에는 영어 기사 자체가 없었다. 나는 동인분의 얼굴에 가득 묻어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동인분이 영자 언론사인 연세 애널스에서 글을 쓰신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고 곧바로 연세 애널스가 보관된 책장으로 향했다. 다시 처음부터 1960년대의 지면을 훑었다. 10분 넘게 책장을 넘기고 넘겨 1966년 지면에서 마침내 글을 찾았다. 동인분의 얼굴은 한순간에 밝아졌고 거듭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동인분이 나가시자 도대체 어떤 글이었는지 살펴봤다. <Romantic Reminiscene In Authumn>. 제목 그대로 글은 한 소녀와 함께 보낸 대학 시절의 가을날, 그리고 그 소녀에 관한 꿈을 다루고 있다. 꼭 찾고 싶었던 50년 전의 기사치고는 짧고 단순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A3 종이에 복사된 지면을 들고 편집국을 나가시던 동인분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글 속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밝은 표정이었다. 1966년 지면에 실린 짧은 글 하나로 그 가을날의 추억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새삼 기록의 힘을 느꼈다. 사람의 사고와 기억은 불완전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고 시간이 흐르면 옛 기억은 자연스레 새로운 기억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기록하는 행위는 기억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그렇게 기억은 하나의 사실이 된다. 그날 저녁, 오랫동안 책장 한켠에 쌓여있던 일기장을 다시 꺼내봤다. 기억나는 일보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 더 많지만,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내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나의 날들도 또 다른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기록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확고해졌다.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쓰지 않았던 일기를 얼마 전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고,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도 노트에 끄적인다. 굳이 거창한 이야기를 쓰려하지는 않는다. 오늘 먹은 음식, 공기의 내음, 거리를 걸으며 들은 노래를 기록한다. 언젠가 나의 기록을 돌아봤을 때 오늘이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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