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환 보도부장(QRM·21)
최제환 보도부장(QRM·21)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지난 1987년 6월 9일, 노천극장에는 군부독재를 규탄하는 연세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가 습관처럼 드나드는 백양로의 정문은, 경영학과 86학번 고(故)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곳이다.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는 그렇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계속 짓밟아도 자꾸만 싹을 틔우는 들꽃처럼, 민중은 군부독재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리고 연세인은 민중을 이끄는 데 앞장섰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소명의식이 투철했다. ‘자유와 진리’의 가치를 관통하는 ‘연세정신’의 근원은 바로 그곳에 오롯이 있었다.

지난 1987년 6월 29일에 발행된 우리신문 1075호 1면에는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대학생들의 치열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빼곡하게 채워진 지면에서는 학생사회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면을 아껴쓰기 위해 띄어쓰기를 최소화하는 우리신문사 표기준칙에도 '연세정신'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 1987년 6월 29일에 발행된 우리신문 1075호 1면. 상단에는 고(故)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하단에는 김기정 기자의 십계명 '단두대'를 찾아볼 수 있다.
▶▶ 1987년 6월 29일에 발행된 우리신문 1075호 1면. 상단에는 고(故)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하단에는 김기정 기자의 십계명 '단두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연세정신’은 따분한 역사책 한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또는 학생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식은 지 오래, 40년 전의 ‘치열함’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그 빈자리는 ‘학점’과 ‘취업’ 그리고 ‘SNS’ 등이 꿰찼다.

혹자는 ‘시대상황’이라는 변수를 근거로 들어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쉽게 말해 군부독재시대와 2023년은 상황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과감하게 ‘다르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눈에 보이는 ‘위기’가 없을 뿐이지, 학생사회에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다.

지난 13일에 있었던 확대운영위원회(아래 확운위)는 ‘학생사회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줬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장단 인준의 안’이 부결되면서 회의를 진행할 의장이 없어졌다. 의장 대신 확운위의 이름으로 확운위를 폐회할 수도 없었다. 일부 확운위원들이 의결권을 유기하고 회의장을 무책임하게 떠났기 때문이다. 의장의 공석과 정족수 미달로 확운위를 진행할 수도, 폐회할 수도 없게 되자 중앙운영위원회(아래 중운위) 위원들은 ‘임시 중운위 의장’을 선출하고, 임시 중운위를 소집했다. 임시 중운위에서 ‘총학생회장단 권한대행’을 새로 선출하고 나서야 확운위는 폐회될 수 있었다.

한 줄로 정리하면 ‘혼란’ 그 자체였다. 준칙의 미비, 빙빙 돌아가는 복잡한 논의 절차, 회의장을 떠난 확운위원들의 무책임함이 한 데 섞여 확운위는 ‘난장판’이 됐다. 이러한 혼란은 ‘학생 대표자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학생사회에는 몇 년 동안 구심점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다. 여러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대표자조차 부재한 것이다. 저조한 투표율, 무관심 같은 문제들은 이제 케케묵은 ‘학생사회 위기론’으로 묶인 지 오래다. 어쩌면 시대가 변한 게 아니라, 연세정신의 ‘치열함’만 식어버린 것은 아닐까.

학생사회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대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진행된 총학 선거 투표율을 보면, 개표 가능 조건인 50%의 문턱을 넘지 못했거나 연장 끝에 간신히 넘었다. 혹자는 반대표를 행사하기 위해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기권’이나 ‘반대’는 ‘무투표’와 지니는 의미가 다르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케네디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민주주의는 ‘최종적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노력, 계속적인 희생, 그리고 필요하면 그것의 방어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이다. 건축물이 짓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점검과 보수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민주주의 또한 쟁취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통해 완성된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왔는가. 기존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혁명’에서 비롯됐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 또한 지독하리만큼 치열한 투쟁과 희생으로 점철돼 있다. ‘연세정신’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보이지 않는 부조리를 타파하고 예방하기 위해서는 참여하는 ‘연세정신’으로의 복고가 필요하다.

「연세춘추」 1075호 1면 하단에는 김기정 기자가 쓴 ‘십계명’이 있다. 십계명의 제목은 <단두대>. 내용은 이렇다.

 

"소수 정치인과 관료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국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저항의식은 더 이상의 독재를 거부하고 참다운 민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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