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보도부장(인예철학/사회·19)
최은수 보도부장(인예철학/사회·19)

독립과 함께 경기도민으로 살게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학교와 집을 오가느라, 서울 이곳저곳을 쏘다니느라 대중교통에서 보낸 시간도 적지 않게 된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40여 분간의 긴 귀가를 위해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였다. 문득 버스 안을 울리던 목소리. 도착지를 알리는 정갈한 안내방송과는 다른, 조금은 투박한 목소리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승객 여러분 모두 걱정과 슬픔은 이 버스에 내려두시고, 편안히 귀가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어서 나온 영어까지.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사님은 직접 녹음한 위로를 승객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서울의 큰 지하철역을 지나고 상암의 방송국촌을 거쳐 경기의 주거 밀집 지역으로 향하는 버스 노선. 매일 비슷한 일상 속 지친 얼굴로 오가는 이들은 한 기사님의 호의이자, 배려, 그리고 순수한 애정을 불쑥 받아버렸다. 조금은 놀라고 조금은 먹먹해진 채로 어떻게 기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머릿속으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승객들은 하나둘 하차 벨을 눌렀다. 그리고 조금은 놀랍게도 내리는 이들은 모두 기사님께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세요! 조심히 가세요!” 나도 비슷한 말을 하고는 도망치듯 버스를 내렸다. 왠지 눈물이 났다. 집으로 가는 동안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다시 기사님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기사님의 친절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고, 버스에 탔던 우리는 지친 하루의 끝에서 작은 미소를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이방인이던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의 하루를 잘 보냈다는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매일을 살아가는 일상 속, 예기치 못한 친절이 일으킨 작은 파동이었다. 같은 시간과 장소를 살아내는 한 사람이, 특별하지 않은 날이 특별해지도록, 모두에게 사랑을 전했다. 뭉클해진 마음을 곱씹다 보니, 독립 직후 외롭고 서러운 마음에 서울은 차갑고 매정한 도시라고 생각했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틀렸던 것은 아닐까. 작은 파동에서 시작한 물음은 금세 쉽게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울은 그저 서울이다. 서울이 차가웠던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서울을, 내 주변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 삶 속 지나쳐온 수많은 버스 기사님들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와 내 세상을 사랑하도록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 기억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정도의 작지만 소중한 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현재의 삶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과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흔들림 없는 평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붓다는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야 사성제를 깨우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머무르는 마음’에 대한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으로 머무르지 못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 역시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와 다가오지 않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못한 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를 후회하는 것은 또 다른 불안과 고통을 낳을 뿐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의 촛불이 돼 세상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쉽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매 순간에 머물러 주변까지 밝히는 이들이 있기에 나의 세상과 당신의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도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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