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 보도부장​​​​​​​(철학/정외·18)
이현진 보도부장(철학/정외·18)


​​​​​​​“원래 명문대 나온 사람들은 사업을 못 해요.”

3년 전, 크라우드 펀딩 교육에 참여했던 내게 초면인 A씨가 했던 말이다. 당시 나는 가벼운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운 좋게 전문적인 교육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그 첫날, 갑작스럽게 나를 공격하는 A씨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지고야 말았다. 참석자들끼리 모여 사담을 나누던 중 누군가 내 프로젝트를 두고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한다고 했죠?”라고 물은 것이 발단이었다. “직접 발로 뛰어 봐야 감이 생기는데, 탁상 공부만 한 사람들은 그걸 못 하거든.” A씨는 그러고도 몇 번을 더 맥락 없는 ‘명문대 샌님론’을 설파해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A씨가 노골적으로 내게 반발심을 드러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가까운 현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입학한 2018학년도, 그리고 2021년까지도 반복해서 연세사회에 화두로 등장하는 소재가 있다. 바로 캠퍼스 간 소속변경 제도다. 올해는 보도부장으로서 관련 기사를 기획하며 이를 조금 더 찬찬히 뜯어볼 기회가 있었다. 지켜본바 소속변경 제도를 폄하할 때 공통으로 등장하는 논리는 이것이다. “신촌캠 학생들은 명문대에 입학할 만큼 ‘능력’ 있고 ‘노력’했으므로 응당한 보상을 누려야 마땅하다. 이를 침범하려는 세력은 용납할 수 없다.” 심지어 일부 미래캠 학생들조차 이 논리에 동조하며 신촌캠 학생들의 분노에 공감하는 모습을 봤다.

애석하게도 위 논리는 불편한 ‘능력주의의 오만’을 함축한다. 오늘날, 대부분이 맹신하는 능력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마땅한 보상을 줘야 한다는 점이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이 같은 능력주의가 개인에게만 잔혹한 책임을 지운다고 설명했다. 즉,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다’를 달리 말하면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며, 이들의 관점에서 보상받지 못한 사람들은 ‘패배자’다. 그렇기에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감을 준다. 이다음에는 우월감에 휩싸인 승자들로부터 오래도록 모멸 받은 패자의 동요가 뒤따른다. A씨의 갑작스러운 공격도 유사한 맥락일 것이다. 이는 비단 A씨 사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능력주의의 오만에 대한 블루칼라의 반감이 트럼프를 당선시켰으며, 영국인들은 브렉시트를 관철했다.

그러나 존 롤즈(John Rawls)에 따르면 우리의 자연적 재능, 이를테면 대입에 필요한 학업 역량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다. 심지어 롤즈는 노력하려는 의지 자체와 시도조차도 단지 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우연의 영역을 배제한 채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을 믿고 싶어 한다. 당연하다. 나는 그럴 만해서 행운을 가질 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는 당장 과거 귀족들의 지배 논리와도 유사하지 않은가? 그만큼 능력주의는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의식 깊이 스며있다.

그리고 한 일화가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가족들과 호주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시드니 야경을 구경하던 중 가이드가 재미있는 무용담을 들려줬다. IMF 위기가 닥치자 무일푼에 제련 기술 하나만 가지고 호주로 왔는데 이제는 시드니에 번듯한 아파트를 샀고, 취미로 가이드 일을 하며 인생을 즐긴다는. 그때 동생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니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다행이지?” 맥락은 이렇다. 나는 굉장히 허술한 성격에 잔재주도 없는 편인데, 신기하게도 학업 성적은 학창 시절 내내 최상위권이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동생의 말을 들여다보자면, 그것은 내가 손기술이 중요한 호주에 태어났다면 밥 벌어 먹고살기 힘들었을 거라는 놀림이었다. 당시에는 웃어넘겼건만, 최근 들어 이 농담을 다시 곱씹어보니 굉장히 의미심장한 결론이 알맹이로 남았다. 내가 수능과 내신 공부에 최적화된 학업 역량을 타고난 것, 그것이 한국형 대학입시에서 굉장히 반겨지는 재능이라는 것, 나아가 한국에서는 대학 간판이 인간의 가치마저 상징하는 어마어마한 권위를 가지는 것은 모두 나의 운이라는 사실 말이다.

샌델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가 그런 운명의 우연성을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따른다. 그리고 그 겸손은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겸손이야말로 우리대학교, 나아가 전 세계에 가혹한 능력주의 이념이 퍼져있는 오만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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