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진 사진영상부장 (인예국문/언홍영·19)

“너무 많은 것이 변했음을 말하려니 내가 이미 달라져 버렸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진으로 무엇인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길고양이를 바라보는 것과 굉장히 닮았다더라. 혹여 그들의 살랑거리는 꼬리가 먼저 내 다리를 감싸고 돈다 해도, 그날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비릿한 냄새의 생선을 꺼내 든다면 고양이는 내 의도대로 곁에 다가오기 쉬워지겠지만, 그 순간부터 변할 무엇인가를 감당해야 한다. 지나가는 그 작은 발걸음이 멈추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가만히 지켜보던 나였다.

내가 카메라를 들던 때, 목에 건 스트랩은 마치 나의 숨통을 옥죄는 올가미 같았다. 순간을 담는다는 것은 꽤나 멋진 일이지만, 찰나의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될 의무가 전제됐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고, 크레딧 앞에 얼굴을 붉히기 싫었다. 얼마나 많은 조작법을 시험해보며 연습했던지. 정작 취재를 하기도 전에 SD카드 메모리 용량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난 미련할 만큼 열심이었다. ‘잘 찍어야지’가 아니라 ‘못 찍으면 안 돼’라는 과한 마음가짐은 단 한 순간도 셔터를 대충 누르게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장소에 가본다는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보다 못한 당시 부장이 자신감을 가지라며 2시간이 넘도록 훈계할 정도였으니, 나의 능력과 사진에 대한 불신의 크기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이 무뎌지길 간절히 소원했다. 아무런 걱정 없는 그 순간이 나에게도 오면, 그때가 바로 ‘어디 가서 사진 좀 찍는다’고 말 할 수 있는 사진기자가 된 것이리라.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나도 모르는 새 찾아왔고, 그 순간은 내가 바라던 만큼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차’ 싶었다. 안일한 생각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진에 대한 나의 기억을 잃은 후였다. 이취임식 때 당당하게도 말했었다. 원고지 10매에도 담지 못할 희로애락을 사진 한 장에 담아내는 기자가 되겠다고. 그러나 취재 현장의 분위기는커녕, 짙게 박힌 내 이름 석 자가 생소할 지경에 이르렀다. 원하는 순간을 찍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불필요한 잡생각에 불과했다. 현장에 대한 개입으로 나의 파렴치를 합리화할 구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한 장에 사건을 직관적으로 담아내기보다는 두루뭉술한 답으로 독자에게 이해에 대한 책임을 전가했고, 어쨌든 결과를 보여줬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무상한 기자 생활을 보낸 나의 안목이 좋을 리 없다. 처음 사진영상부의 소속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이 집단이 단순히 지면 매체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만 여겨지지 않길 바랐다. ‘혹여 당신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없도록’ 사진영상부가 본분을 다하기를 원했으나 이는 주안점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결국 ‘독자들을 보게 만들겠다’는 일념에 도달하기 위해 버둥거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꼴이 돼버렸다. 내가 속한 조직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순간에 맞닥뜨리니, 카메라를 든 채 사시나무처럼 떨던 내가 그리워지더라. 그때의 나는 ‘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가장 용감한 겁쟁이였다.

이 자리까지 오르지 말아야 했다. 제대로 쓰인 적도 없이 먼지 쌓인 부장 명함은 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본분을 잃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정신 차려보니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졌다. 나의 빛바랜 이면을 들추며 쉼 없이 달려온 2년을 마무리 짓자니 속도 없이 가슴이 저린다. 이 글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바치는 속죄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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