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매거진부장 (영문·17)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화두는 단연 페미니즘이다. 한 달에도 수십 가지의 화젯거리가 생기는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 오랜 기간 동안 부동의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포괄성이 아닐까.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기 때문에, 또 나머지 절반은 남성이기 때문에 사실상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특별히 뭘 공부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부여된 성별로 살아온 역사가 여러 주장의 근간이 된다. 끊임없는 논쟁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인터넷 기사 댓글이나 익명 커뮤니티들을 보다 보면 페미니즘 관련 논쟁이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다. 

 

‘네가 여자로 살아봤느냐’ 
‘그러는 넌 남자로 살아봤느냐’ 

혹은
‘네가 군대를 가봤느냐’ 
‘그러는 넌 임신을 해봤느냐’

 

나는 여자로 살아봤다. 아쉽게도 남자로 살아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 아직 입대 생각은 없다. 임신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이 논쟁에 낄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끝없는 논쟁에 마침표를 찍어줄 (남자와 여자로 모두 살아본) 초월적 존재는 대체 어디 있는가.

같은 세상에 살지만, 우리가 경험한 세계는 각자 다르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하나의 세상을 구성한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그 세계 사람들을 주로 만나며 지낸다. 그럴수록 그 세계는 공고해지고 사람들은 그 밖의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곤 한다.  

성별도 하나의 세계다. 특수한 점은, 취향이 반영되는 대부분의 세계와 달리 생물학적 성별의 세계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다. 바꾸고 싶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고 15주 정도가 지나면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하니 가장 오랫동안 개인이 속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이 두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와 잘 섞이며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는 것이다. 어울리기만 했을까, 사랑도 한다. 나름 그렇게 잘 살아왔다.

갑자기 페미니즘 바람이 불어 잘 살고 있던 남녀 사이에 갈등을 조장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에서야 여성의 권리가 남성의 권리와 그나마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왔기에 두 세계가 충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충돌이 그 자체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두 세계가 충돌한 후 튕겨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지구상에서 두 세계 중 하나를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두 세계가 잘 어울려야 한다는 것에 그 누가 이견을 가질 수 있을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해와는 사뭇 다르다. 애초에 겪어보지 않은 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일단 받아들이고 보자는 거다. 남녀갈등에 대한 논쟁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는 언젠가부터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이해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단번에 이해시키려는 것도, 남의 세계가 이해돼야 인정하는 것도 욕심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자신의 세계에 관해 설명할 때, ‘내가 알기론 그렇지 않은데?’가 아니라 ‘그렇구나’ 하자는 의미다. 어떤 사심과 편견도 없이.

편견이라는 건 성급한 일반화에서 비롯되고, 개인이 하는 모든 일반화는 그가 속한 세계에서 만들어진다. 이를 다른 세계에 적용해선 안 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세상의 전부일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 틀어박혀 그 밖의 사람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부딪칠 때, 공격은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향하는 게 아니라 내 속의 오만과 편견을 향해야 한다.

이 끝없는 논쟁에 마침표를 찍을 초월적 존재는 결국 우리(내)가 만들어내야 한다. 편견 없이 각자의 경험에 귀 기울여 이를 모으고 하나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서로에게 서로의 세계가 완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녀(그)는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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