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안팎에서 한창이다. 지난 2018년부터 거국적인 백 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남북공동기념사업을 제안할 정도로 3·1절 위상도 부쩍 높아졌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개설한 삼일 운동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는 3·1운동 관련 사실과 활동지역 등을 전자지도에 입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당시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의전을 다녔던 선배들의 행적도 찾아볼 수 있다. 학생들은 3월 5일 학생시위를 개최하고, 전국 각지로 내려가 지방 시위를 주도했다. 이는 지난 2월 중순에 열렸던 우리대학교 의사학과의 3·1운동 백 주년기념 학술대회와 세브란스 독립운동사 책자 2권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현재 어느 때보다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으나 3·1정신을 계승하지 못하는 모습도 일부 보인다. 여전히 보여주기식의 관변 행사가 대표적이다. 유관순의 포상 등급조정도 상훈법 조항의 개정이 있었어야 했다. 3·1운동에 참여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심사와 포상지원은 본 궤도에 오르지도 못했다. 3·1운동에 참여해 공훈을 인정받은 사람은 5천여 명에 불과하다. 당시 사망자 7천645명, 부상자 4만 5천여 명, 실형을 산 사람과 태형을 받은 사람, 이름 모를 수백만의 참여자들은 언제 심사대상에 올라갈지 모른다.지금의 제도로는 독립유공자 심사가 앞으로 100년은 더 걸릴지도 모른다. 더구나 친일행적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사람도 많아 재심사라는 숙제도 남아있다.

최근에는 3·1운동을 단순히 ‘3·1운동’에 그치지 말고 하나의 사회혁명으로서 ‘3·1 혁명’으로 명명해야한다는 주장도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역사 교과서나 일반 시민의 인식은 일제 식민지에서 신음하던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자주와 독립을 주창하는 국민으로서 탄생했다는 근대 국민국가의 서사에 머물러있었다. 3·1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 운동가들을 주목했듯, 모든 억압과 차별을 넘어 세계의 평화와 비폭력·민주 혁명의 정신을 드높였다는 관점으로 3·1 운동에 대한 이해를 확대해야 한다.

우리 연세인은 민족 억압과 차별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와 인류평화를 기원했던 학생들의 독립선언서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당대 대표적 지식인 최남선과 이광수처럼 3·1독립정신을 배신하고 친일지식인의 길을 걸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엄혹한 시절, 중국과 몽골로 나가환자를 구호하는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필순이나 이태준과 같은 세브란스 출신 선배들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 3·1운동을 맞이할 때마다 윤동주 시비와 기념관도 방문하며 선배들의 정신과 삶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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