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모 편집국장 (언홍영·15)

줄곧 연세를 동경했다. 꼭 입시생 때만의 얘긴 아니다. 병치레로 세브란스를 드나들던 다섯 살 무렵부터다. 대학 교정인지도 모르고 멀리서 바라본 백양로는 싱그러웠다. 동경의 이유는 점점 늘어갔다. 파란색, 독수리, 세련미, 지성, 유구한 역사, 동주와 한열과 빛나는 이름들이 좋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단어는 자유였다. 애써 적기 새삼스럽게도 자유야말로 기독교 정신과 함께 연세를 관통하는 개념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교훈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타교와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어느 학교는 오직 진리를 좇는다. 어느 곳은 정의를 얹는다. 하지만 연세대는 자유에 방점을 찍는다. 수단은 진리고 목적은 자유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진리를 탐구한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그렇다. 교훈뿐 아니라 학내 학문 지형에서도 자유에의 추구가 드러난다. 지배적인 분과나 유파에 치우치기보다 여러 관점이 공존한다. 

그런데 올 한 해를 곱씹으면 절로 회의(懷疑)하게 된다. 연세 사회에 참된 자유가 남아있는지, 그렇다면 누가 자유로운지 따위의 의심이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인권축제 강연 연사 선정에 반대 여론이 일었다. 연사가 극단적인 여성주의자이며 신성모독자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강연 반대 연서명이 진행됐다. 시위가 발생했다. 논란은 총여학생회 지도부에 대한 공격으로 비화했다. 비난은 이내 기구 자체의 존립 근거로 옮겨갔다. 총여의 ‘재개편’을 놓고 학생총투표가 이뤄졌으며 이제는 총여 폐지 서명이 진행 중이다. 

지면을 빌려 총여의 필요성을 역설하거나 그들을 향한 비판 자체가 부당하다고 지적할 생각은 없다. 총여의 구조적 문제로 재개편이 필요할 수 있다. 회칙 부재를 지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기구 존립에 대한 시대적 필요 유무를 두고 토론할 수도 있다. 비판과 논의는 얼마든 이뤄질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반(反)자유적 단면이 아쉽다. 당장 격론의 시발점이 연사 적합성 논란이란 사실이 아이러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성역 없는 논쟁은 지식의 근간을 이룬다. 17세기 영국 사상가 밀턴(John Milton)은 사상의 공개시장을 주장했다.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컨대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는 것이다. 시사점은 분명하다. 최소한 모두에게 발언권이 돌아가야 한다. 모두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특정인의 강연을 원천 반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연사가 부적절하다면, 강연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합당한 논거로 조목조목 따지면 될 일이다. 혹은 아예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반대 의사를 표현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아예 입을 막는 것은 그중에서도 하수고 악수다. 무대가 대학, 그것도 자유의 성전을 자처하는 연세대라면 더욱더 그렇다. 우파든 좌파든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자유로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전유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공개시장만 만들어 두고 ‘자유로운’ 논의를 기대하긴 어렵다. 밀턴은 이를 간과했다. 성숙하고 건설적인 토론 문화가 전제돼야 한다. 익명의 무수한 비난과 인신공격, 신상털이와 희화화 아래 사상의 공개시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기에 십상이다. 그것은 자유라기보다 차라리 방종이다. 링 위에서 주먹을 주고받으면 스포츠지만, 룰도 심판도 없이 장외에서 때리면 폭행에 지나지 않는다. 공개시장에 최소한의 상호 존중이 없는데 누가 선뜻 사상을 내놓겠는가.

일단 사태는 수습 국면이다. 총투표 가결 이후 TFT가 회칙 제정을 포함한 재개편을 논의하고 있다. 와중에 새 총여 지도부가 당선됐다. 그러나 자유의 문제는 비단 특정 사안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의 기치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연세의 본령이고, 그래야만 성숙한 학문 공동체로서 전진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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