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영화 같을 때가 있다. 거대기업 삼성과 싸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듯, 반올림이 삼성을 눌렀다. 사실 이 이야기는 벌써 영화화됐다(『또 하나의 약속』(2014)).

이야기는 11년에 걸쳐 있다. 지난 2007년 3월 삼성 반도체 부문에서 일하던 20대 초반의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삼성은 이 사망에 대해 무책임했다. 같은 해 11월 반올림이 결성됐고 삼성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삼성은 해외 산업안전 전문업체를 통해 삼성 공장과 백혈병의 무관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조사에 사용한 데이터는 공개하지 않았다. 2012년 2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3년의 연구에 의해 반도체 공정과 백혈병이 유관할 수 있음을 밝혔다. 2014년 5월 삼성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황씨의 산업재해는 2014년 8월 서울고등법원에서 확정됐다. 2018년 11월 23일 삼성은 최종 사과하고 보상 및 재발방지안을 발표했다.

이상의 일지를 보면 삼성이 이름값을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성은 대한민국의 대표기업이다. 삼성의 행보는 우리 사회에 거대한 빛과 그림자를 던진다. 그런데 지난 11년 삼성은 이 일에서 얼마나 무책임했던가. ‘또 하나의 가족’이란 슬로건이 무색해지는 지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선진성에 걸맞지 않게 다양한 문제를 노정해왔다. ‘연대(solidarity)’는 그 문제들을 해결해온 20세기 개념이다. 이 개념은 주로 을(乙)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됐다. 그러나 이제 연대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시대가 오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넘어서는 ‘특이점(singularity)’이 곧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인간이라면 갑이든 을이든 연대하여 새로운 보편성의 시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런 시대에 이른바 초일류기업인 삼성이 20세기적 책임 철학에도 못 미치는 행태를 보인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기계를 만들다 생명을 잃은 직원에 대해 삼성이 갖고 있던 윤리의식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 전태일이라는 한 청년이 1960년대에 깨달았던 인권에 대한 이해를 삼성이 외면했다는 건 새삼 놀라운 일이다.

인간을 생산수단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역사의 퇴물이다. 직원은 경영자가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되는 무엇이 아니라 존엄한 인격체다. 직원의 건강은 회사가 지켜줘야 할 최소한의 책무다. 그것을 회사가 훼손했을 때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고 재발방지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단순한 자세를 삼성이 취하는 데 11년이 걸렸다는 건 우리 사회 일각의 심각한 인권 불감증을 드러낸다.


삼성이 뒤늦게나마 다시 사과하고 종합적인 보상책과 재발방지책을 실천한다니 다행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삼성뿐 아니라 우리 기업 전체가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만들며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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