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샘 편집국장 (철학/언홍영·15)

신문 편집에서 손을 막 뗀 내 눈길을 끄는 건 고전이다. ‘대학생이니 고전을 읽어야 해!’라는 대단한 생각에서 출발한 건 아니었다. 보고 있던 미국 드라마 『뉴스룸』에 한 책이 몇 차례 언급되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자극적이지 않은 진짜 뉴스를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를 돈키호테에 비유하니 멋있어 보이더라. 그래서 며칠 전부터 이 『돈키호테』를 읽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참 모호하다. 인물에 대해 곱씹게 된다. 허구로 기사 서품을 받은 이 사람을 기사로 봐야 할까? 그걸 떠나서 풍차를 보고 거인이라며 돌진하는 이 사람을 그저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어찌 됐건 정의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이니 정의롭다고 해야 할까? 아니나 다를까 ‘돈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서만 달라지진 않는 것 같다. 요즘 돌아가는 형국을 보아하니 돈키호테라고 할 만한 이들이 몇몇 눈에 띈다. 인물의 모호함만큼이나 어떤 관점에서 바라본 돈키호테인지는 다 다르다.

여성 인권을 위해 세상에 돌을 던져왔다는 총여학생회와 그런 그들을 지지하는 ‘우리에겐 총여학생회가 필요하다.’ 이들의 폐쇄적인 행보와 존재 이유 자체에 의문을 던지며 ‘학생 인권’으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제29대 총여학생회 ‘모음’ 퇴진 및 총여학생회 재개편 추진단’. 그런 와중에 보도를 해보겠다는 연세춘추. 풍차를 겨누듯 서로를 겨누고 있던 창이 페이스북, 에브리타임, 중앙운영위원회를 막론하고 몇 개였는지도 모르겠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이들 중 누구를 돈키호테로 볼지 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돈키호테를 긍정적으로 볼지, 부정적으로 볼지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고고하게 앉아 누가 정의로운 돈키호테가 될지, 그저 과대망상에 빠진 이로 전락할지 오락처럼 지켜보고 싶진 않다. 그럴 깜냥도 되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선 어떤 돈키호테가 필요할지 생각할 뿐이다.

 

책을 얼추 읽으니 모호함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선다.

총여학생회가 돈키호테가 된 모양새다. 물론 돈키호테처럼 자기가 덧씌운 거인 이미지로 그 풍차를 바라본 것만은 아니었다. 거인이었다. 연세대라는 공동체 안에도 젠더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견제하며 반성폭력 움직임을 보여 왔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대한 필요는 아직 이 공동체에 남아있다. 여전히 젠더 불평등 요소가 연세 사회 곳곳에 자리하는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총여학생회는 앞으로도 거인을 겨누는 그 상징, 돈키호테가 돼야 한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으나 그 맡은 바를 다하고 나서 더 이상 구성원으로부터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주를 이룰 때 다시 사라짐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게 마땅하다.

한편으로 그 돈키호테는 자신의 옆에 있는 싼초의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줄곧 현실을 주지시키려는 싼초에 아랑곳하지 않던 돈키호테는 호되게 당하고야 만다. 돈키호테는 나름의 쓴소리를 해댄 싼초의 말을 들어 보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총여학생회라는 돈키호테는 어떤 싼초에게 어떤 말을 듣고 움직여야 하는가. 요즘의 논의는 이걸 둘러싸고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휴회와 속개가 끊이지 않은 채 유례없이 길게 진행됐던 중앙운영위원회였다. 중앙운영위원회에서의 논의와 무관하게 총여학생회를 둘러싼 잡음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겨울 총학생회 선거가 빚어낸 일련의 사태보다도 진을 빼놓고 있다.

작금의 문제 제기와 논의가 무의미하다고 폄하할 순 없다. 어떤 단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면, 열린 장에서 끝까지 논의하는 건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짐이다. 그리고 기나긴 논의 속에서 누군가는 돈키호테에게 싼초가 될 것이다. 단, 돈키호테가 향하는 궁극적인 방향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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