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범 총무국장 (정경경제/언홍영·14)

2년 6개월. 24살에 시작한 대학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기간 동안 학보사에 몸을 담았다. 동년배 친구들은 한참 전부터 사회의 길을 걷고 있고, 학교 동기들의 취업 소식이 하나 둘 들려온다. 서른을 앞둔 지금까지 학보사에 있으며 얻거나 느낀 것이 무엇인가.

# 1. 동료의 한마디

필자는 무지한 사람이다. 1년 즈음 된 사건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중국 음식을 시켜먹자는 의미로 “짱개 시켜먹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한 동료가 날린 따끔한 일침에 입술을 세게 내리쳤다. 그렇다. 무심코 뱉은 한마디는 필자가 좋아하는 래퍼들이 받았던 억압과 같았다. 묵직하고 웅장한 비트에 한 줄 한 줄 읊조리는 그들의 외침에 공감하며, 타인을 비하하는 말을 무심코 내뱉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당신도 생각해보길 바란다. 무심코 친구들에게 웃으며 병X이란 단어를 뱉고 있지 않은지. 무심코 뱉은 한마디는 누군가를 들쑤시는 비수일지 모른다. 만약, (필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입술을 세게 내리치길 바란다.

# 2. 친구의 게시물

필자는 비겁한 사람이다. SNS를 하다 보면 몇몇 친구가 올리는 게시물 중 페미니즘이나 소수자에 관한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필자의 엄지는 정지한다. 필자의 성향을 규정당하기 싫다는 미명 뒤로, 다음 게시물로 숨는다. 불편한 세상을 꼬집는 그들의 게시물에 엄지나 하트를 날리는 것이 어려운 자신을 검은 액정을 통해 마주한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본인의 게시물이 ‘불편할 때’ 공감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필자도 그렇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떳떳하지 않았고, 부끄러웠다. 이 글을 통해 말한다. ‘반성한다. 공감한다. 응원한다.’

# 3.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는 잣대

필자는 여전히 무지한 사람일 수 있다. 틀림과 다름의 사전적 의미만 알 뿐, 그 둘을 가르는 잣대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갖가지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틀림과 다름을 멋대로 규정하고 그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위선자 가면을 썼다. 내 멋대로, 내 프레임대로 소수자와 페미니즘을 규정했다.

e.g “페미니즘, 소수자 이슈는 틀린 것이 아니라 좌우 이념처럼 다른 거야”

이제 더이상 페미니즘이나 소수자 이슈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규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성인권과 소수자인권은 당사자들의 노력으로 큰 전진을 이뤘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앞서 말한 페미니즘이나 소수자 이슈의 다름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이를 규정하는 잣대도 결국 다수의 패러다임, 그 테두리 안에 있다. 그렇다면 다름을 말하는 것보다 먼저, 외치는 자들의 목소리를 생각해야 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고, 소수자로 살아보지 않은 필자가 과연 무슨 잣대로 틀림과 다름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인가. 이제 둘 사이를 멋대로 가르는 나의 프레임을 부술 차례다.
다름을 규정짓기 전, 본인의 잣대가 그른 것인지 성찰할 자세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나와 다르지 않았고, ‘그들’이 아닌 ‘우리’였다.
나는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내가 멋대로 판단한 페미니즘과 소수자 단말마는 ‘나와 그들의 다름’이 아닌 ‘우리’였고, 나의 ‘틀림’이다.

뒤돌아보니 2년 6개월 동안 깨달았던 것은 부족함이고, 깨달은 것이 가장 큰 선물이다. 당신도 생각해보길 바란다. 당신이 무지하거나, 비겁하거나, 여전히 무지한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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