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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미투 운동과 펜스룰, 그 차별의 정치학

1965년 투표법 제정 이후 미국에서는 최소한 법률상으론 흑백 간의 분리주의 정책이 금지되었다. 이후 대규모의 노골적인 인종차별 현상은 2008년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정도로 점차 사라져왔고, 성 인지를 제고하는 페미니즘 운동과 더불어 인종차별을 경계하는 다양성의 원리가 미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최소한 백인이 미국 사회 내 타 인종들을 상대로 가지는 정치경제적 위력은 여전하며 그로 인한 인종차별 역시 은연중에 만연해 왔다는 사실이 작년 트럼프 정권 하에서 명징하게 노출되기 전까지. 그간 산발적으로 발생한 크고 작은 인종혐오 범죄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 2017년 여름 버지니아주 샬로츠빌에서 발생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나치 경례를 모방해 “트럼프 만세”를 외치며 대낮에 벌인 거리행진은 백인우월주의를 조장하는 트럼프 정권 하에서 인종주의의 유령이 언제든 노골적으로 소환될 수 있음을 환기했다.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를 타산지석 삼아 그 이후 서구에선 인종주의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자 금기시 되어 왔다. 하지만 불평등한 권력 구조에서 비롯되는 냉혹한 대량학살이 지구촌 곳곳에서 끊임없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힘들다. 즉 기존의 평등, 인권, 그리고 다양성의 민주적 가치에 대한 표면적, 혹은 상징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약자에 대한 기득권의 차별과 혐오는 미국 사회에 항시 기생하며 자기성찰이 부재한 시간과 장소를 노려 언제든 퇴행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아니 발생하고 있다.

SNS를 타고 한국 사회로까지 급격히 번진 미투 운동의 원인을 인종주의의 그것에 비유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사실 미투 운동은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서 파생되는 구조적 문제이며 펜스룰은 그 구조의 고착화를 심화시키는 핑계에 불과하다. 성추행 및 폭력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단순한 개인의 병리적 성욕 문제가 아닐뿐더러 특정 직종이나 출신, 혹은 정치적 사상이나 종교적 신념의 유무나 차이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나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이다. 미투 운동은 연예계, 정치계, 예술계, 영화계, 교육계를 비롯해 절과 교회를 포함한 종교계 등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 곳곳에서, 사람의 개별적 성향과 무관하게 위력에 의한 권력형 범죄의 형태로 발생한 성폭력들을 폭로하고 있다. 독재가 권력의 장기적 독점으로 인해 필시 정치적 부패로 이어지는 것처럼, 시장경제에서 소수 기업의 지배적 독과점이 불공정한 가격경쟁과 불공평한 자원분배로 귀결되는 것처럼, 미투 운동을 통해 고발되는,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은 결국 위계적 권력의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자행되는 누구나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미투 운동의 본질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일방적 폭력의 문제로 환원되는 남녀 성의 사적이고 은밀한 문제가 결코 될 수 없다. 따라서 미투 운동에 대응해 남녀의 불필요한 오해 소지를 불식하려는 방편으로 인식되는 펜스룰 같은 미봉책으로 개선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최근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이자 대학교수의 자살 사건에서 보듯, 우리 사회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는 미투 운동은 가해자로 지목되는 남성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혹자는 미투 운동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엄밀히 말해, 미투 운동은 남녀노소를 망라하고 2차 성징 이후의 모든 인간이라면 성범죄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인식할 때 보다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 사이의 인종적 ‘차이’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평등권을 가질 수 있는 ‘다름’의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객관적 차이를 가로지르는 위계와 위력의 불평등한 관계는 그 차이를 언제든 차별로 변질시키는 불편한 잠재성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남녀의 차이는 그 자체로 평등한 관계의 전제이지만, 한국이건 미국이건 미투 운동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언제나 차별의 형태로 존재해 왔음을 반증한다. 펜스룰이 기존 남녀 간의 위계의 질서와 위력의 관계에 큰 변화가 없는 정치, 경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차이를 핑계로 남녀 간의 차별을 고착화하는 것은 물론, 미투 운동에 대한 성숙하지 못한 기득권의 집단적이고도 감정적인 대응에 불과하다. 인종차별을 개선하고자 약자에 대한 배려 정책인 “적극적 차별폐지 정책”을 시행했을 때 미국의 주류 사회는 인종을 구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소위 “컬러 블라인드” 문화로 대응했다. “트럼프 만세” 속에서 함축된 미국의 나치식 집단광기는 차별을 차이로 읽으려 한 기득권 집단의 위선에 기생한 사회적 병폐의 필연적 결과이다. 불행히도, 차별의 불평등한 관계는 뒤에 감추고 보편적인 차이만을 강조하는 이러한 집단적 위선이 2018년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서도 엿보인다. 미투 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펜스룰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보다 근본적인 여성 혐오나 계급주의 등 차이를 차별의 형태로 악용하고 그 속에 내재하는 위계와 위력의 관계를 향유하려는 기득권의 치기 어린 감정적 투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미투 운동에 의해 지목된 가해자가 사실관계의 부인과 변명, 그리고 법적 권리를 외치기 전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을 손가락질하며 ‘나’의 도덕적 성 윤리를 안위하기 전에, ‘우리’ 모두 자아 성찰이 더 필요한 이유이다.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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