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진 편집국장 (언홍영·14)


본디 쓰고 싶었던 건 사람값에 대한 글이었다. 나날이 참신해지는 갑(甲)들의 막말 사건, 부당 대우, 다시금 불거진 특성화고교 현장실습 환경문제 등 온갖 인적 병폐를 듣고 보면서 물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빽 소리를 질러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뒀다. 안온하게 살아가는 내 주제에 사람의 가치를 논하는 글을 쓸 만큼의 격이 있는가 싶어서다. 마감 언제 할 거냐는 재촉 문자가 쏟아지는데 또 글을 안 쓸 수는 없으니, 그 대신 예전에 만난 스님들의 이야기나 좀 풀어볼까 한다.

2년 전 가을, 나는 단풍이 한창인 해인사에서 독특한 스님들을 만났다. 사실 춘추 생활에 매몰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절 덕후’였다. 불교 신자인 할머니의 영향 덕인지 어느 날 부석사에서 얻어먹은 토마토가 맛있었던 덕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절 투어의 일환으로 방문한 그곳에는 수다쟁이 스님들이 있었다.

한 스님은 꽤 지긋한 인상이었는데, 수행한 지 몇 년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요새 스님들은 속세의 풍파를 모두 겪은 후에 출가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더라. 스님이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잔잔한 미소를 띠고 마당을 쓰는 ‘스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마당을 쓸고 있는 분이 있긴 했다. 젊은 스님이었는데, 나와 수다 떨던 스님은 여대생들이 와서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드는 거 같다며 그 스님을 놀려댔다. 충격적인 건 스님의 아들 자랑이었다. 친구가 고려대를 다닌다고 하자 자기 아들도 고려대 나왔다며 얘기를 시작했다. 출가하기 전 기자였다는 어떤 스님은 이런저런 인생 얘기에 본인이 겪은 부귀영화까지 일단의 썰을 풀어냈다. 스님, 속세를 못 벗어나신 것 같은데요, 하고 웃자 스님의 대답이 압권이다. 나도 사람인데?

그렇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속세를 벗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동치가 아니다. 어떤 교리를 체화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와 관계없이 우리는 ‘사람’이라는 똑같은 기반을 갖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이를 망각하고 스님을 나와 다른 저울에 올려놓고 스님이라면 이래야지, 하고 재고 있었다. 내가 가족 자랑 애인 자랑에 바쁜 것처럼 스님도 자신의 관계에 무한한 사랑을 품고 있는 게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속세를 끊어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수행일 뿐이다. 스님 말마따나 나도 스님도 사람이다 보니 그렇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으로서의 상대에 대한 존중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스님 이야기를 하위 치환해 오랜 특성화고교 현장실습 병폐에 대입해보자. 고용주에게 현장실습생은 본인과 같은 ‘사람’으로 다가왔을까? 무늬만 사람이지 사실상 매출을 올려줄 일시적 수단 정도가 아니었을까? 더 확장해 학교에게 학생들은 어떤 존재였나?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한 취업률 하한선에 맞추기 위한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폭언을 쏟아붓고 안전설비도 되지 않은 환경에 그를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숱한 막말 사건도 마찬가지다. 굳이 중범죄로 확장할 필요도 없다. 다른 누군가에게 “싸가지 없다”고 내뱉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희롱을 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존중이 결여돼 있다.

경쟁을 배우고 자란 세대에게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나 또한 이따금 사람을 목적 아닌 수단으로 볼 때가 있다.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배운 가치가 나의 영달인데 어찌 아니 그럴 수가. 연세춘추에서 편집국장까지 역임하면서 기자 개개인보다 당장 내일 나와야 할 기사 한 편에 그리고 독자들의 좋아요 하나에 목을 맨 적이 있었고, 어떤 관계를 더 우선으로 둬야 하는지 늘 저울질했다. 옳은 선택도 있고 잘못된 선택도 있겠지만 후회라는 잔상은 생각보다 짙게 남는다. 다행인 점은 나는 이게 잘못임을 알고 있고, 저항의 역사가 쌓이면서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사람을 외치는 것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이렇게 하나 둘 넘어가다 보면 금방 낙원에 다다를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으로 가득 찬 사회는 어떨지 감히 상상해보며 오늘로써 국장의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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