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고 있다. 나의 목소리를 실어 보낼 수 있는 매체는 무수하고, 나의 귀로 들어오는 다른 이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이전보다 자유로워진 소통 환경은 단순히 형식의 측면을 넘어 소통의 내용에 영향을 주게 됐고, 다원화된 세상에서 모든 목소리가 일치할 순 없기에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한 우리는 다른 점에 대한 또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소리는 대체로 ‘비판’ 혹은 ‘비난’의 형식을 띤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는 법은 어렵지 않다. 국어사전은 비판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이며, 비난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이라고 정의한다.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한 (물론 현실에서 적용할 때는 그리 간단치 않은) 비판과 비난 구분법’이 아니라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기 위해 갖춰야할 자격’이다.

비판은 따로 자격이 필요할 정도로 쉽지 않다. 비판하기 전 인지해 둬야 할 것은 비판을 하고자 하는 대상이 행위 자체든, 혹은 행위자든 간에 내가 먼저 알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피상적인 내용을 말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근거’는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작품에 대해서는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제일 잘 알고, 어떤 행동의 이유나 문맥적 상황은 그 행동을 한 사람이 제일 잘 알기 마련이다. 행위자의 입장을 고려해보고, 이를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사실(fact)을 수집하고 공부해야 비판다운 비판을 할 수 있다.

공연에서 배우가 실수를 했다면 물론 ‘실수를 했다는 것’자체도 비판거리가 된다. 하지만 보다 비판다운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실수로 인해 야기된 미흡한 전달력에 좀 더 비판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관객과의 호흡, 전달력이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되는 공연의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비판의 대상은 단순한 ‘실수 여부’ 라기보단 그 너머의 ‘미흡한 전달력’이며,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공연의 특성’에 근거한 ‘앎’이 필요하다.

‘앎’도 결코 쉽지 않은 비판의 자격이지만 그 자격에 더 추가하고 싶은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애정’이다. 뜬금없을 수도 있다. 근거까지 들어가며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됐다고 꼬집는 비판에 애정이라니? 비판은 반박을 듣기 위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치열한 반박이 이어지는 논쟁적인 사안일 수도 있겠지만, 근거있는 비판이고 양 측의 입장이 논리가 있다면 그 입장 차이는 소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줄어들고, 이상적인 방향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비판하려는 대상이 나의 비판을 통해 좀 더 나은 변화를 이뤘으면 하는 마음, 애정이 비판의 기저에 있다면 비판의 자격은 충분하다.

세상에는 ‘비판’이라는 형식은 갖춘 목소리들이 난무한다. 마치 홍수처럼. 하지만 홍수가 발생해 이곳저곳 물은 넘치지만 정작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 생수같은, 자격있는 비판은 흔치 않다. 비판의 자격을 논함은 비판의 문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단순히 감정적인 반박이 아닌 건설적으로 나아지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비판이 했으면 하기 때문이다. 비판을 하는, 그리고 비판을 받는 서로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자격부터 갖춰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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