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좋은 세상 ‘싸이월드’ 개발자 이동형을 만나다

생일 선물로 ‘도토리’를 주는 것이 가장 센스 있는 선물이라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더불어 그 말을 잘못 이해해 손자에게 진짜 도토리를 한 아름 선물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말이다. 한때 가입 회원 3천5백만 명을 돌파했던 ‘싸이월드(Cyworld)’는 한국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아래 SNS)’의 신화였다. 싸이월드에 하루 종일 매달리는 사람들을 빗대 ‘싸이폐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연예인부터 대통령까지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개설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는 실로 엄청났다. 안타깝게도 현재 ‘페이스북’ 등 새로운 SNS에 그 자리를 내줬지만 싸이월드가 한국 SNS 문화, 더 나아가 한국 인터넷 문화에 큰 획을 그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성공신화의 주인공, 싸이월드를 개발한 나우프로필 대표 이동형(49)씨를 만났다.

맑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자유롭게 자랐다. 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가득 모은 날이면 마치 부자라도 된 듯 뿌듯해 하기도 했고 초등학교 시절 학교 공부는 미뤄 두고 미술에 매진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자유로운 성향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했다. 경북대 유전공학과에 진학한 그는 기타, 당구, 무전여행 등 다양한 분야의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대학가요제 지역 예선에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다채로운 관심 분야를 가지고 있었던 그였지만 의외로 컴퓨터에는 도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에서 같이 컴퓨터를 공부하자고 여러 번 권유를 받았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왜냐하면 컴퓨터는 딱딱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과의 소통과 교류를 중요시하던 그에게 컴퓨터는 소통이 없는 메마른 기계로 보였던 것. 그렇게 컴퓨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대학생활을 보냈다.

'사이좋은 세상' 만들기

이씨가 '싸이월드'를 구상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일을 돕던 그는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컴퓨터 관련 회사에 입사했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비인간적이라며 멀리했던 컴퓨터를 처음으로 배우게 된 그는 놀랍게도 프로그래밍에 빠져들었다. 그는 “컴퓨터는 굉장히 정직한 물건”이라며 “입력한 대로 값이 나오고 프로그래밍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 마치 생명체와 같다고 느껴 ‘철수’와 ‘순이’라고 이름까지 붙였다”고 말했다. 이후 인터넷을 접하게 된 그는 인터넷을 통해 ‘철수’와 ‘순이’가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인터넷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사이좋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이씨는 그렇게 ‘싸이월드’를 개발했다.
싸이월드의 시작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창업한 해인 지난 1999년부터 몇 년 간 싸이월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회사를 꾸려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외주를 받아 다른 사이트를 만들며 ‘미니홈피’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서서히 싸이월드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경쟁 사이트가 유료화 되면서 사람들이 싸이월드로 이동해 오기도 했다. 드디어 긴 기다림 끝에 지난 2002년, 싸이월드는 돌풍을 일으켰다.

다시 처음으로

소규모 벤처 기업으로서 막대한 서버 운영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는 투자할 기업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SK가 싸이월드 인수를 제시했고 그는 SK에게 운영권을 넘기기로 했다. 이후로도 계속 개발에 참여한 그는 싸이월드와 함께 승승장구했고 SK에서는 싸이월드를 해외에 진출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싸이월드 글로벌 프로젝트’다. 그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시작은 일본이었다. 그는 싸이월드 일본 사이트 개발을 위해 지난 2004년 시부야로 건너갔다. 하지만 싸이월드의 일본 진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미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SNS와의 경쟁도 어려웠을 뿐더러 자신의 일상생활을 남들에게 보여야 하는 싸이월드의 성격은 일본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좌절을 통해 그는 “싸이월드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용자들이 만든 것임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싸이월드는 일본에서 철수를 결정했고 그는 싸이월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결심했다.

'싸이월드', '페이스북'…그 다음은?

그렇다면 그는 SNS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금의 SNS는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틀 위에 사용자는 내용만 얹고 서비스로 인해 파생되는 이익은 다시 개발자가 가져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앞으로의 SNS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고 그 결실 역시 자신이 얻게 될 것”이라며 SNS의 미래를 예측했다. 그는 현재 ‘랜드마크’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그가 생각하는 SNS라고 얘기했다. 랜드마크란 이용자들이 직접 사진과 글로 지역의 소식을 기록해 공유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계속해서 축적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사는 지역의 가감 없는 역사를 자유롭게 구성하고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이 대표는 성공의 비결을 묻는 젊은이들에게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창업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며 “하고 싶은 일로 창업을 하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마지막에 남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하려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이 녹아있는 랜드마크가 이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떠한 연결을 이뤄낼 수 있을지 벌써 기대된다.

유자헌, 조혜수 수습기자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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