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춘추 보도국 부기자로 처음 임명받았을 때, 나는 꽤나 들떠 있었다. 우리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아직 첫 연고전도 지내보지 않은 1학년 새내기였던 나는, 드디어 ‘연세춘추 111기 보도국 부기자 조가은’이라는 의미 있는 호칭(과 멋진 명함!)을 받게 됐다는 뿌듯함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정당한 뿌듯함이었다. 나는 첫 과엠티도 포기하고 수습기자로서 금요일마다 미우관을 지켰으며, 불타오르는 111기 카카오톡방에 의지해 방학 내내 원주세미나 과제를 수행했다. 그 보상으로 나는 학내사안에 대한 전문성과 날카로운 문제의식, 약자에 대한 배려를 몸에 새긴 그 이름도 찬란한 보도국 기자가 됐다.
 이제 내가 보도국 기자로서 연세춘추를 만들기 시작한지도 만 1년이 다 돼간다. 그러나 부기자로서 가졌던 사명감은 지금 많이 남아있지 않다. 첫 제작때 아이템을 받고, 이걸 어떻게 취재해서 기사를 쓰지 막막해 하면서도, 잘못된 사실을 전달해서 부장님과 독자들한테 혼쭐이 날까 두려워하면서도, ‘학생들이 궁금해할테니까’ 혹은 ‘밝혀볼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생각하며 취재원과의 약속을 잡고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잡고 인터뷰를 하던 나였다. 지금은 1년 전보다 취재에 훨씬 익숙해졌다. 나름 친해진 취재원들도 꽤나 생겼고, 더 이상 예전처럼 취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이제는 지면에 기사가 실리는 것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무 번에 다다르는 제작에 보도국 기자로서 참여하며 나는 ‘내 입맛대로’ 아이템을 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국제캠에 있는 기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취재원들이랑 불화를 만들면 안 돼’ 혹은 ‘난 이런 불편을 겪은 적이 없어’라는 이유로 학생들의 아우성을 무시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또, ‘학교 취재원 한 명, 학생 취재원 한 명만 만나도 기사는 나와’라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로 대강 취재하고 기사를 써낸 적도 많았다. 일 년 전만해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기사는, 이제 쉽게만 써졌다. 중간고사 휴무를 앞두고 마지막 제작을 했던 4월, 나는 이런 내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윤동주 시인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기사가 쉽게 써질수록, 취재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수록, 아이템을 받기 위해 드나드는 취재처의 직원과 친해질수록, 나는 사무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장님을 도와 이제 막 연세춘추 활동을 시작한 수습기자들의 미숙하지만 열정 가득한 기사를 교정하다보면 그 부끄러움은 더욱 심해진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연세춘추에서 기자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이제 끝나간다. 이제 늦게나마 나는 처음 취재수첩을 구해 일기도 취재도 아닌 열정의 조각들을 써내려갔던 순간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부끄러움 속에서 용기를 내 그동안 ‘이런 기사는 한번 써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 시행해보고자 한다. 이번 지면에 실리는 르포 기사도 그 일환이다. 연세춘추 기자로서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이제 와서야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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