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춘추에 113기 수습기자들이 들어왔다. 춘추에서의 기자생활에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눈을 반짝이며 면접을 보는 지원자들을 보니 4학기 전 그 자리에 섰던 내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대학교 새내기, 치열했던 고교생활을 끝내고 20대로 내딛는 첫 시작이 주는 막연한 설렘에 가득 차 있던 내가 유난히 좋아하던 단어는 ‘청춘’이었다. 청춘이 뭐냐고 누군가가 물어보면 막상 대답할 말을 잘 찾지도 못하면서 그냥 그 단어가 가지는 느낌 자체를 좋아했다. 연세춘추 지원서에도 청춘과 관련된 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고, 내 지원서를 본 선배 기자는 면접 때 나에게 물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면 지금 우리가 아파 보이냐고. 내가 의도하고 썼던 청춘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질문이었지만 나는 대답했다. 아파 보인다고. 신체적으로 아프다는 것이 아니라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나 상황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마음이 아플 것 같다고.
4학기째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 나에게 아프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요’다. 나는 그다지 아프지 않다. 심지어 학내 사안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보도국 기자임에도, 내가 면접 때 말했던 것처럼 ‘세상’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더 담담해진 듯하다. 어떤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 그 상황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기보다는,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 어떤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팠는지 아니면 담담했는지조차도 이번 수습기자들 면접을 계기로 문득 생각한 것이다. 처음 연세춘추에 입사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잃어버린 건가 자아 반성을 하기도 잠시, 나도 모르게 기자라면, 아니 좀 더 확대해 ‘청춘’이라면 아파야 한다는 게 맞는지 의문을 던지며 자기 합리화를 위한 첫걸음을 떼고 있었다.
‘청춘’이면 아파야 하나? 우리가 흔하게 내뱉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표현을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고자 할 뿐이다. 사실 단순히 청춘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만을 생각할 때 청춘이든 청춘이 아니든 누구나 힘들고 아프다. 모두 자기 나름의 고민이 있고 아픔이 있으며, 타인의 아픔보다는 나의 아픔이 더 크고 깊다. 누가 더 아픈지는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춘과 아픔을 결합해서 사고하기엔 기준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청춘이 아깝다. 나는 그냥 청춘, ‘청춘’이라는 단어 자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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