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부르뇌프, 게오르크 루카치, 미하일 바흐친, 르네 지라르, 프랑크 모레테.
그는 저명한 문학 이론가들의 어려운 문학 이론에 기반한 창작을 하며 자신이 창조한 소설과 독자 사이에 놓인 소통의 통로를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그의 소설을 어렵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 소설 쓰고 있네. 이러니 국어 성적이 그 모양이지.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교실을 탈탈 흔들었다. 국어 선생은 집게손가락으로 열다섯 살 쇼팔로비치의 이마를 두어 번 밀었다. 쇼팔로비치의 머리가 통통 튀어오르는 공처럼 두어 번 앞뒤로 움직였다. 국어 선생의 입에서 술냄새가 후욱 번져 나왔고 밤새 술자리에서 희희낙락거렸던 시간을 지우고자 향수를 과하게 뿌려댔는지 그 독한 향기가 쇼팔로비치의 콧속을 간질였다. 콧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향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빙글빙글 돌았다.
- 앞으로도 수업 시간에 이런 시덥잖은 연애 편지 쓰려면 아예 오지마!
국어 선생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노트로 쇼팔로비치의 머리를 탁, 내리쳤다. 노트는 쇼팔로비치의 머리 위에서 퉁, 튀어올랐다가 책상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꼴에 연애 편지는. 저렇게 생긴 애들이 더 응큼해. 아이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덤으로 함께 엎어졌다. 당신, 정말 문학을 전공한 국어 선생이 맞나요. 저는 시를 배울 때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요.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지워지기 전에 노트에 적는거라구요. 내가 노트에 적은 아름다운 소녀의 이야기가 정말 아름다운 소녀의 이야기로 밖에 보이지 않나요. 그래도 당신은 선생인데,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이었군요. 쇼팔로비치가 국어 선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소리없이 터져나오는 울음에 끝내 막혀 버렸다.
- 견고한 상처의 미학, 현대인의 고독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수작, 어둡고 치밀하게 그려낸 자유에 대한 갈망.
문학 평론가들은 국어 선생과 달리 쇼팔로비치의 글을 제대로 읽어냈다. 그가 발표하는 소설마다 이러한 찬사를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쾅쾅 찍어 주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알아주는 게 고맙고 반갑고 기뻐서 그들과 오랫동안 소통하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었으나 소설에 권위있는 평론가들의 찬사가 쾅쾅 찍힐 때마다 그는 더욱 상처에 침잠해야만 했다. 상처와 고독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결정적인 키워드임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글을 진정성있게 쓰기 위해 상처와 고독과 자유에 대한 갈망 안에서 지루한 쳇바퀴를 돌아야만 했다. 그는 행복해질 수 없었다. 행복해지는 순간, 상처와 고독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지워지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해주는 키워드들이 지워진다면, 문단에 심어 놓았던 존재감 역시 신기루처럼 무너질 것이었다. 외모나 성격이 아닌, 오로지 글로만 자신을 평가하고 인정해주는 집단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교수와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작품 세계를 쉽게 바꿀 수 없었다. 어느덧 소설에 다글다글 붙여진 평론가들의 각주들이 그가 써야할 소설의 방향성에 대해 압력을 넣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사소한 일로도 상처를 받아야만 했다. 상처는 어느새 문단에서 팔아먹을 수 있는 슬픈 명예가 되었다. 그가 상처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설 창작이었고, 소설을 창작하기 위해선 상처가 필요했다. 팔아먹을 상처가 있다는 건 천형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절대로 엠을 곁에 둘 수 없었다. 엠은 그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엠이라는 행복을 잡는 순간, 자신이 와장창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처음으로 분노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슬픔을 느꼈다.
- 엠,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소설가라는 직업? 평론가들의 찬사? 문단에서의 존재감? 문학상? 아무리 많은 글을 써도 내 마음은 아귀가 들어 있는 것처럼 외롭고 공허한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걸까. 무엇을 해야할까. 처음 글을 쓰며 느꼈던 순수한 기쁨이 없는데. 이젠, 더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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