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동경했던 삶과 동경했던 삶에서 보기 좋게 이탈해버린 현실 사이의 틈을 비집고 휘이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줄기차게 새어나오는 후회가 루에의 머릿속에서 우당탕탕,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던 그 때, 쇼팔로비치는 침묵과 어둠이 카펫처럼 고요히 깔린 방에서 한 시간 전에 온 장문의 문자를 읽고 있었다. 읽고 다시 읽고 또 읽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버렸다. 한 시간이나 지난 줄도 모른 채, 읽고 다시 읽고 또 읽는 중이었다. 그 문자는 엠에게서 온 것이었다.

- 네가 쓴 소설 잘 읽고 있어. 요즘 권위 있는 문학상들의 수상 후보로 네 이름이 자주 언급되더라. 난 이미 글쓰기와 먼 삶을 살고 있는데 너에겐 여전히 소설을 쓸 수 있는 그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난 조만간 엄마가 될 거야. 요즘은 남편이랑 전망 좋은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너무 좁기도 하고, 베란다를 통해 보이는 거라곤 바둑판처럼 갑갑하게 구획된 주차장뿐이거든. 거실에서도 바깥 경치를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예쁜 아기를 낳고, 잡음 없는 평온한 삶에 내 몸을 둥글게 말아 넣은 채 살아가겠지. 한때는 동성애도 지지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을 억압하는 위선적인 윤리와, 열등과 우월을 당연하게 나누는 비뚤어진 편견을 박살내고, 나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평범한 여자들의 삶이 그러하듯, 시간 속에 편안한 자세로 몸을 담그고 나도 유유히 흘러 가려해. 뒤로도 돌아가지 않고 옆으로도 새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곧게 흐르는 단조로운 모습으로. 방황하고 갈등하던 젊은 날의 나는 없어. 재능 없음. 그게 날 요약해주는 말이야. 난 너의 곁에 오랫동안 남아있고 싶었어. 네가 나의 뮤즈가 되어 주길 바랐어. 작가는 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선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그 어떤 영감을 너에게서 받고 싶었어. 너에게서 받은 영감을 통해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 그땐. 그땐, 그랬어. 이젠 내 기억에서 뭉텅뭉텅 잘려 나가버린 그땐. 앞으론, 이제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녕.

쇼팔로비치의 휴대전화 옆에서 응결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후회와, 그 후회의 꼬리에 은근슬쩍 매달려있던 그리움, 미움, 설렘 따위의 감정들이 녹아서 뚝뚝, 흘러내리다가 차차 흔적도 없이 증발할 때 즈음에 온 문자였다. ‘권위 있는 문학상들의 수상 후보’라는 말이 쇼팔로비치의 눈동자에 아프게 박혔다. 그 다음엔 문자의 마지막 문장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두두둑, 가슴에 박혔다. 두두둑, 박힌 문장이 쇼팔로비치의 가슴에 피멍을 만들어 주었다. 쇼팔로비치는 피멍이 번진 가슴을 몇 번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자신이 여전히 엠을 잊지 못하는 건 아마도, 엠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엠이 떠나고 나자 쇼팔로비치는 비로소 자신이 외로운 사람임을 실감했다. 엠을 만나기 전에도 물론, 쇼팔로비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엠을 만나는 동안에도 어쩌면, 쇼팔로비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엠을 만나기 전이나 만나는 동안에나 쇼팔로비치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에도 막상 엠을 보내버리고 나자 타인의 발자국 하나 없이 반반하고 깨끗하기만 했던, 황량한 자신의 삶을 매일 되돌아보게 되었다. 쇼팔로비치의 가슴에 곱게 물들어있던 피멍이 그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혼자였어, 혼자가 되었어.

외로움을 몸에 꽁꽁 싸매고 대학에 다니던 시절, 쇼팔로비치가 처음 합평을 받았던 소설은 처음부터 다수의 독자를 상대로 쓴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오직 문학 평론가들을 겨냥하고 쓴 배타적인 소설이었다.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이 배운 사람들뿐이었다. 소설을 읽은 동기들은 하나 같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그의 소설에 대해 공격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동기들의 반응은, 쇼팔로비치의 기억 끄트머리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도 못한 채로 휘익, 날아가 버렸다.

김 헌 (국문·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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