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났다. 연일 수능에 대한 이런저런 기사들이 나오는 걸 보며 3년 전, 막 수능을 마쳤던 때의 내가 떠오른다. 무한한 해방감과 함께 이제껏 나를 규정시켰던 모든 환경이 어느 시점을 기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니 충격에 가까운 변화였다. 자신에게 허여할 수 있는 자유의 양이란 책임감과 반비례한다. 대학입시라는 긴긴 마라톤이 끝나는 그 시점에 난 엄청난 자유를 얻었고 스스로를 옥죄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나의 ‘객관적’ 젊음과 자유라는 보상은 그 당시 내겐 최고의 무기였다.
 요즘은 부쩍 시간이 가는 것이 무섭다. 내 모든 삶에서 젊음을 빼면 남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내기의 한 때는 ‘벚꽃엔딩’의 익숙한 음과 함께 울렁이며 생각나는, 그런 박제된 이미지가 돼버렸다. 결코 보낸 적 없는 시간은 어느새 날 사회초년생의 입구로 몰아세운다. 젊음이라는 상대적 개념 속에는 지독한 합리화가 숨어있는데 예전에는 '합리화 이 나쁜 녀석'에서 짧은 반성을 끝내곤 했다. 아직은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안주 삼아 ‘꽤 괜찮게 살고 있음’이라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머리를 굴리며 위로를 한 것이다. SNS에 수없이 올라오고 또 올렸던 ‘나 잘 살고 있음’에 대한 글과 사진도 그러한 위로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의, 그리고 당신의 젊음은 영원한 명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을 보면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요, 마음의 상태이다. 장밋빛 볼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과 활기찬 감정에 달려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좋아하는 시지만 아직까진 가슴 깊숙이 동의 하진 못하겠다. 가장 큰 이유는 젊음을 소비하고 있는 나의 위치 때문일 것이다. 언제 이 소비가 끝나 벼의 숙임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 또한 그 과정에 속해있음을 안다.
 지금 이 글을 씀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스스로 있었던, 있는, 있을 길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신문사에서 보낸 4학기의 짧지 않은 시간 역시 무채색으로 남을 수 있었던 내 젊은 날에 대한 나름의 결정이었다. 이런 결정이 쌓여 결국엔 내가 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결정들에 대한 겁과 두려움이 늘어가는 것만 같아 맘이 불편할 때가 있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실패보다 개인에게 가혹한 것은 선택하지 않음 그 자체이다. 그것은 책임과 결과에 대한 회피이기 때문이다. 책임감을 져버리고 자유를 택할 때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삶은 B와 D사이에 C다’라는 명언처럼 선택의 끝에서 대학입시보다도 더욱 길고, 길이 없던 마라톤의 끝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느 날 뒤를 돌아봤을 때, 수많은 계산부호에 말려 허탈한 뒷모습을 하지 않길, 지금 잡고 있는 일들이 떨어지는 깃털이 아니길, 젊음이 순간이라면 그 순간 속에 온전히 살고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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