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물론 자신감을 온 몸에 돌돌 두르고 사는 루에가, 단순히 굶지 않기 위해 꿈을 접은 건 아니었다. 그는 예술 고등학교에서 문예학을 전공하던 시절부터 이미, 예술을 한다는 말을 뒤집어 엎어 놓으면 그 뒷면엔 가난이란 낙인이 새겨져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소설가가 되어버리는 최악의 상황 역시, 꿈을 접은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루에가 존경을 넘어선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19세기 미국문학의 대표작인 「모비 딕」 의 작가 허먼 멜빌은 사후에야 조명을 받은 작가였다. 루에는 불멸의 고전을 남길 수 있다면, 평생 무명과 가난이라는 버거운 짐을 등 뒤에 짊어질 용기가 있었다. 루에가 돌돌 두르고 있는 자신감은 그 자신의 몸을 데굴데굴 풀어, 무명과 가난이라는 버거운 짐이 주는 압박감을 돌돌 말아 루에의 눈 앞에서 보이지 않게 일시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었다.  즉, 루에가 소설가의 꿈을 접어버린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했던 표면적인 이유들은 비겁한 핑계에 불과했다. 루에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여러 가지 표면적인 이유들에 바짝 눌려 얇은 밀가루 반죽처럼 납작해져버린 진짜 이유를 정면으로 응시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소설을 창작할 때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외로움, 그 외로움과 동행해야만 하는 지난한 인내를 견뎌내기가 두려웠다. 예술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예술 대학에 입학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목표했던 예술 대학의 문예학과에 안전하게 착지한 후엔, 루에는 길고 지난하고 외로운 창작의 고통을 껴안은 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십대 시절의 자신감과 패기와 용기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감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글이라는 소극적인 표현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루에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다. 입시의 감옥에서 벗어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숨구멍이 트이게 되자 루에의 곁엔 마치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듯, 입시가 주었던 외로움을 금세 잊어버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와글와글 생겨났다. 루에는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으므로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살 수 있었다. 주변에 외모가 출중한 남자들이 삼백명 가량 있다 해도, 그 사람들이 루에의 배경이 되어 버릴 정도로, 혹은 누구나 쉽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루에를 찾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뛰어나다는 형용사의 의미를 더욱 훌쩍 뛰어 넘어서 뛰어 났다고 해도 허황된 표현이 아니다. 게다가 루에에겐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맞춰주는 재주가 있었다. 사교적인 모임의 필수 코스인 술자리에서 술잔에 떨어지는 농담과 고민을 웃음과 함께 마셔낼 수 있었고, 정치와 예술 그리고 여자처럼, 오징어 다리와 같이 흔해빠진 안주거리로 등장하는 필수적인 이야기 소재 거리들도 즐겁게 질겅질겅 씹어 버리곤 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다음 날이면 증발해버릴 허망한 것들일지라도, 설령 자신의 저녁과 새벽을 꿀꺽 삼킨 술자리가 훗날 돌이켜보니 거짓으로 질척댄 시간이었음을 깨달았을지라도 루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엠이 쇼팔로비치와 틀어지자마자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건, 이러한 그의 언변과 낙관적인 성격의 힘이 컸다. 그럼에도 루에의 가슴 한 구석엔 이루지 못한 꿈이 되어버린 소설가라는 직업이, 마치 자신에게 가까이 있었지만 끝내 잡을 수 없었던 이상형의 여자처럼, 가끔 자신의 가슴을 먹먹하고 슬프고 쓸쓸하고 아련하게 만들어 버렸다.
예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루에는, 자신이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될 것이라 믿었다. 실천을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그저 헛된 망상이었다. 지금은 잡지사 편집장이라는, 대학을 졸업하기 바로 직전 까지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직업을 갖고, 소소한 일상에 행복을 누려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루에는 소설에서 완전히 등을 보일 수 없었다. 끝내 잡을 수 없었지만 끝내 잊어버리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상형의 여자와 같은 소설가를 평생 동경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김 헌 (국문·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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