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2년 동안 NP(Non Pass)없이 수강했던 채플은 필자에게 ‘참을 수 없이’ 가벼웠다. 시험 전 주에는 공부를 핑계로 빠지고, 과제를 끝내지 못한 날에는 초청강사로 오신 분들께 정수리만 보인 채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렸고, 졸린 날에는 강연내용의 지루함을 변명삼아 열심히 수면활동에 집중했다. 그때는 그렇게 채플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행동들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을 선택해야 했던 입시시절에도 미션스쿨인 연세대학교를 다니면 기독교수업과 채플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대한민국 수험생 다수가 그러하듯 필자에게 연세대학교는 미션스쿨이 아닌 최고의 명문사학이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는 성적과 무관한 채플이 더욱 필자에게 가볍게 여겨졌다. 성적이 평가되는 기독교 수업은 열심히 수강했지만 ‘출석’만 하면 통과되는 채플은 빨리 끝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패스기준 정도만 참석했고, 그 시간조차도 아깝고 단순히 의미 없이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가 자신을 가볍게, 그리고 무겁게 여기는 두 여인을 모두 사랑했던 것처럼, 가끔은 채플이 무겁게 다가오는 시간들도 있었다. 스윗소로우의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취해 마치 콘서트장에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SBS 음악감독님의 현란하고 유쾌했던 연주에 심취해 50분이 너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매번 초청되어 오셨던 강사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과제를 하면서, 그리고 졸면서 간간히 들었던 강연내용은 종교적인 이야기보다 본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들에게 해주고 싶은 선배들의 진심어린 충고들이었다.

채플시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훌륭하신 강사님들의 이야기는 결코 가벼운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떤 수업들보다 기억에 남고 곱씹어 보게 만드는 무게가 있었다. 사실 채플이 항상 나에게 ‘귀찮은 존재’는 아니었다. 매주 누가 초청강사로 오는지, 대화채플에는 누가 오는지 친구들과 이야기했고, 친구들과 채플강연을 주제로 대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필자는 채플을 수강하던 그 때. 그렇게도 채플의 무게를 무시했던 걸까.

언제부턴가 가시적인 이익, 경제적 가치가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도 손익을 따져 보상을 바랐고, 상처받는 건 손해니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식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과 머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수업을 찾아 듣기보다는 어떤 것을 배워야 ‘취업’에 유리한지 은연중에 계산했다. 그 속에서 채플은 졸업을 위한 단순한 과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겨우 4년 중 2년의 대학생활을 끝내고  ‘채플’을 수강하면서 나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고 혹자들은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2년’의 대학생활을 하고, 채플을 패스한 필자가 한마디 하자면, 올해부터 바뀐 ‘채플 규칙’은 연세대에 들어온 학생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를 패스의 기준으로 삼은 학교 측의 행동의 강압성이 안타깝다. 하지만 당신의 소중한 50분과 강연자의 소중한 50분이 함께 만나 서로가 ‘소통’하는 동안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손해이고, 참을 수 없는 하찮은 일일까. 조금 씁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패스를 해야만 하는 당신에게 그리고 채플이 소중한 ‘소통의 시간’이 될 당신들 모두에게 손해는 아닐 것 같다.

 

권지인(신방·11)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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