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거스르는 안타까운 천재들의 이야기

많은 사람들은 ‘천재성’을 동경한다. 노력으로만 달성할 수 없는 업적을 세우고, 매우 복잡한 공식을 간단한 한 개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그런 능력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흔히 ‘천재’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역사가 되어서도 끝없는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고 했던가. 그 당시 사회가 만들어낸 굴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진 재능을 다 피우지 못한 비운의 천재들의 이야기가 담긴 역사의 뒤페이지를 열어보자.

IQ210의 회사원, 김웅용

지난 8월, 국내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에 ‘세계 10대 천재’가 링크돼 눈길을 끌었다. ‘슈퍼스칼러(SuperScholar)’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 중 한국인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기의 천재 ‘김웅용’은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다.
IQ 210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IQ를 자랑하는 그는 5살때 4개 국어를 구사하고 6살 때 방정식과 적분 문제를 풀어내 신동으로 꼽혔다. 이어 8살에 미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원이 됐고 4년 후인 12살에 선임연구원이 됐다. ‘천재’라고 불렸던 이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그의 모습에 언론은 한국과학의 아이콘으로 그를 보도했고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을 겪으며 불현듯 그는 16살때 한국으로 다시 건너와 고졸 검정고시를 보고 충북대 토목공학과에 진학했다. 현재 그는 충북개발공사 기획홍보부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혜성같이 등장했던 한 천재의 삶에 대해 방송은 ‘몰락’이라든지 ‘실패한 천재’등의 꼬리표를 달았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 천재와 평범한 삶은 같은 선상에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그는 언론과 대중들로부터 잊혀져갔다. 어렸을 적 수많은 매스컴 앞에서 당당히 수학문제를 풀던 꼬마 김웅용만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계 10대 천재’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기사와 함께 그는 다시 사람들의 관심사가 됐다. 한 방송사에서 ‘IQ210 천재 김웅용’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로 재조명하기도 했다고. 이 다큐멘터리 안에서 그는 NASA를 나온 뒤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결국 15년의 강사직을 뒤로 한 채 꿈을 이루지 못한다. 교수직을 위해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그에게 ‘세기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몰락한 천재’로 둔갑해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몇몇은 현재의 그로부터 과거의 모습을 찾아내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또 다른 사람들은 지나친 언론플레이와 천재라는 이름으로 어린 김웅용에게 쏟았던 기대와 바람이 세기의 천재를 범인(凡人) 혹은 실패한 천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현재 김웅용이 살아온 인생은 아무개의 이름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평범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그의 삶에 만족한다. 그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아들바보’이다. 실제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커스단의 원숭이마냥 천재성이란 묘기를 부린 걸 제외하곤 나에겐 어린 시절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나에게 그 시절은 단지 '잃어버린 시간'일 뿐이죠. 내 아이들마저 그 시절이 잃어버린 시간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방송은 김웅용의 삶을 조명하며 천재의 삶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들 또한 우리와 다름없음을 강조한다. 김웅용, 그는 천재이기 이전에 ‘다름없음’을 인정받고 싶었던 한 사람이었다.
 

동생의 그림자에 가려진 여인, 나넬 모차르트

사랑하는 누나! 누나가 그렇게 작곡을 잘하는지 몰랐어. 그 곡은 정말 아름다워. 계속 작곡을 해 봐
- 1770년 7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많은 사람들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들으면 '음악천재'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겨우 35년의 인생 중 677여개 곡을 남긴 그는, 매년 여행을 떠났다고 하니 그의 곡 중 대부분은 길 위에서 작곡 됐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을 기록한 문헌만 해도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이다. 이처럼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인류 역사상 몇 안 되는 천재라 칭송받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여정 동안 ‘볼프강 모차르트’의 곁에 누나인 ‘나넬 모차르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서로에게 둘도 없는 음악적 멘토이자 라이벌이었다고 하니, 그녀 역시 작곡에 천재적 재능을 지녔던 셈이다. 이렇게 모차르트 남매는 놀라운 실력으로 가는 곳 마다 주목을 받지만, 아버지 레오폴트는 나넬의 천재성보다는 아들 볼프강의 천재성을 더 사랑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볼프강에게 모든 음악적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재능에 대한 모든 투자가 볼프강에게 갈수록 나넬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동생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음악적 달란트를 지녔지만 당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불가능했던 관습과 환경에 의해 나넬은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게 된다.

나넬이 작곡한 노래는 현재 단 한곡도 남아있지 않다. ‘여성’이라는 지위가 그만큼 그 당시에는 하나의 제약이었음을 말해준다. 나넬을 모델로 만들어진 영화 「나넬 모차르트」에서는 음악을 향한 나넬의 열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린다. 그것이 설령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작품이라 할지라도 나넬이 훌륭한 음악가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50여년전 ‘나넬 모차르트’가 아닌 ‘볼프강 모차르트의 누나’라고 기억됐을 한 천재의 노래는 시대가 물린 재갈에 사라졌다. 짧은 기록만이 그녀를 기억하게 할 뿐이다.

가벼우면서도 심각한 분위기가 나도록 대가들의 어려운 협주곡을 연주하는 11살짜리 여자아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아이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 1763년 5월 인텔리겐체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종로의 한 심야극장, 청소원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앉아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죽어있었다. 죽은 남자의 검은 가죽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것은 한 권의 푸른 노트였다. 푸른 노트의 시들은 죽은 두 달 후 한 권의 시집으로 발간된다. 시인의 이름은 기형도…
「기형도 시인에 대한 짧은 기록」中

  


 기형도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6살 때부터 신문에 적힌 한자를 읽었을 만큼 영리한 머리를 가졌다고 한다. 또한 음악적 재능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천재임을 입증한 셈이다. 1979년 그는 우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시집을 준비하던 중 뇌졸중이라는 사인으로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입」 中 ‘빈집’

적막(寂寞)으로 무성해진 한켠 공지(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입」 中 ‘388 종점’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입」 中 ‘질투는 나의 힘’

 위의 시처럼 기형도의 시에는 유독 ‘하강, 은둔, 칩거, 상처’ 등의 이미지가 짙게 드러난다. 시의 전반에 드러나는 그의 작품세계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극한이다. 탁월한 어휘 선택과 표현력은 천재적이며 기발하다. 하지만 그는 위의 시를 포함해 단 60여 편의 시만을 흔적처럼 남긴 채 만 28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시집 한 권 묶지 못하고, 첫 시집이 유고시집이 되어버린 이 시인은 20년이 넘은 지금에서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시를 꿈꾸는 모든 문학청년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넘어서야 할 하나의 벽으로써 존재한다. 암울했던 독재의 시대, 천재성과 극적인 죽음 그리고「잎 속의 검은 잎」이라는 단 한 권의 유고시집은 ‘기형도 신화’를 만들었다. 어둡고 축축한 현실에서 길어 올린, 불길하고 처연한 상상력의 시어들은 90년대의 어떤 시인도 넘어서지 못한 울림을 낳았으며 당시 지식층의 고뇌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시 전문의 분위기, 문장마다 녹아있는 시인의 생각은 괴기스런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입」 中 ‘대학시절’

30여년 전, 그는 오늘 당신이 지나왔을 ‘은백양의 숲’을 거닐며 짧은 발자국을 남겼다. 많은 국문학자들은 기형도에 관한 논문을 쓰고 문학도를 꿈꾸는 청년들은 ‘기형도 신화’를 깨기 위해 또 다시 펜을 잡는다. 시가 아름다운 만큼 채 서른 해를 채우지 못하고 떠난 ‘비운의 천재’를 떠올리며 많은 이들은 안타까워한다. 혹여나 그가 극적인 죽음으로 요절하지 않았다면 보여줬을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글 김은지 기자 kej_824@yonsei.ac.kr
그림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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