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거세게 몰아쳐 바람이 묘지마저도 두드려 댄 지난 여름날, 빗물에 떠내려간 고 장준하씨의 유골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가 억울하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유골은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고 장준하씨는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가장 강력히 비판하던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지금도 유명한 「사상계」의 창간자이며, 독립운동에도 앞장서 광복군의 대위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지난 1975년 8월 17일, 포천군 이동리 약사봉에서 등산을 하다 실족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누구에게나 가족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큰 비극이다. 그러나 장준하씨의 유족은 ‘그가 장준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어디서 비롯됐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고 장준하씨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에 언론들은 줄지어 입을 닫았다. 해당 사건에 의문을 제기한 기자들은 줄줄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유족들에게 남은 것은 퍼즐조각마냥 흩어진 죽음의 흔적들이었다. 석연치 않은 실족 상황,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졌다는데도 상처 하나 없는 사체, 의문의 주삿바늘 자국, 두개골 부분에서 드러난 지름 6cm에 달하는 동그란 상처까지. 이 모든 증거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우리는 37년간 그의 죽음을 ‘의문사’라고만 표현해 왔다.

지난 2004년 6월경까지 이를 파헤쳤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정보기관만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기록들, 서류철들에 대해 모두 ‘존안하지 않음’이라는 답변만을 할 뿐이었다. 유일한 목격자, 아니 조사관의 표현에 따르면 동행자라고 불러야 하는 김용환씨는 공식 기록에서만 수십 번 말을 바꿨다.

이 37년간의 의문사 아닌 의문사는 사회적인 폭력으로 인해 진실이 감춰져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다. 과학·의학적인 퍼즐을 껴 맞춰도 결론은 ‘타살’이다. 정부와 장준하를 죽인 사람들은 이를 언제까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그의 의문사가 박정희, 나아가서 현재 여당 대선 후보인 박근혜와 연결돼 있다고 해서 지금 진실을 밝힐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는 언론과 감사기관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장준하씨는 죽어서도 유골을 통해 외치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그가 죽어서까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과거와 화해할 수 있을까.

정세윤 보도국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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