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과 10일에는 대동제, 11일에는 ‘아카라카를 온누리에’(아카라카)가 열렸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환호하며 즐기는 모습에서 젊음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매년 5월에 치르는 대동제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 부모님들이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대동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 시절의 대동제를 엿보기로 했다.


34년 전, 선배를 통해 본 당시의 대동제

본격적으로 축제 문화의 역사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대학교 선배를 통해 과거의 축제에 대해 들어봤다. 과거 우리대학교 축제를 몸소 즐겨봤으며 현재까지 대학 축제문화에 관심이 많은 김진욱 강사(영문·78)를 통해서다. 김씨는 “70년대의 축제에는 낭만이 있었다”며 “다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노천극장에서 탈춤 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학교 내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경찰들이 벤치를 점령하고 있었다”며 “이런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술판을 벌이는 문화가 생겼다”고 덧붙였다. 그러던 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생기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자유롭게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김민기와 같은 가수들이 부르는 다소 정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문화도 변화했다. 김씨는 “요즘 대학에서의 축제는 핑클, SES 등의 가수들을 부르며 쇼 같은 축제가 된 것 같다”며 물론 대중문화가 대학문화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생 주도의 축제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은 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연세춘추」가 담고 있는 과거 대동제의 모습

그렇다면 「연세춘추」는 옛날 대동제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지난 1983년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된 문과대 ‘문우대동제’ 소식을 살펴보자. 이 해 문우대동제는 기존의 소비적이고 향락적 성격의 축제에서 벗어나, 전통 문화의 창조적 계승과 비판적 대학 정신을 드높인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축제 역시 학회 중심의 학술제, 촌극경연대회, 민속제로 구성됐다. 같은 시기 열린 공과대 ‘연공제’ 역시 이런 흐름과 다르지 않았다. 9월 11일부터 사흘간 ‘뜨거운 몸짓으로’라는 주제로 진행된 ‘연공제’에서는 학술강연회, 민속체육제, 예술제, 그리고 크로스컨트리와 봉산탈춤과 같은 행사가 진행됐다.

또한 응원단의 행사인 ‘아카라카’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는 요즘의 대동제와는 달리 당시에는 ‘연고전’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됐다는 점에 눈에 띈다. 다만 당시 기사에서는 문과대와 같은 일부 단과대에서 학생회가 주관하는 이런 축제를 인정하지 않아 예산 조달과 장소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학교 전체가 함께하는 축제가 아니라 단과대별로 진행됐다는 점도 지금과는 다른 점이다.

 

 

 

 

당시 「연세춘추」가 전하는 대동제의 또다른 특징은 축제를 통해 대학생들이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지난 1991년 대동제의 ‘민중연대의 밤’의 축제 구성을 살펴봤다. 5월 28일에 치러진 이 행사는 민중연대 의식의 확산과 민중문화의 체득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1,2부로 나뉘어 1부에서는 대우자동차, 한진중공업 등의 파업투쟁을 포함한 전국 노동운동 상황을 보고했다. 이어 현 통일문제연구소장인 백기완 씨가 ‘민중연대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경대 군 사건 이후 지난 25일까지의 투쟁 평가와 민중운동진영의 광역의회 선거 대응에 대해 강연했다. 2부에서는 노래패 ‘새벽’ 등의 노래 공연과 민중연대 결의문 낭독, 신촌로터리까지의 횃불행진이 이어졌다. 올해의 축제에도 좋은 취지를 가진 다양한 행사들이 많았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대동제

우리대학교 축제를 단지 학교 안에서만, 학교 구성원들만이 누릴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우리대학교 학생들과의 교류 기회가 마련됐던 사례는 지난 1991년의 ‘시민학생 한마당’이 대표적이다. 광범위한 지역연대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는 취지하에 열린 이 행사는 앞서 열린 ‘민중연대 장터’에 참가한 노동조합과 신촌지역 민주단체, 노점상연합회 등과 학생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지난 2003년 대동제의 행사 중 하나인 ‘청신호 축제’는 학생들과 지역사회 주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장으로 대동제의 영역을 넓힌 행사였다. 이 공연의 특별한 점은 다른 공연들과는 달리 백양로가 아닌 신촌 거리에서 진행됐다는 점이다. 신촌 거리에서 벌어진 이 날의 ‘이동 대동제’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더 넓은 사회를 향한 축제의 움직임도 있었다. 지난 2004년 5월 20일 중앙도서관 앞에서 신과대가 주최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하는 연대 장터’는 일본 정부로부터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행사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행사에서는 술과 음식을 판매해 모금을 하는 활동 외에도 정신대 문제를 담아낸 사진과 배지를 판매하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또 백양로를 지나는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정신대 문제를 고발하는 사진과 글을 전시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래왔다. 과거부터 올해까지 축제는 매년 비슷한 행사들 속에서도 각각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당시의 젊은이들의 유행이 반영됐다. 이렇듯 축제는 우리들의 낭만과 관심사, 사회적 이슈 등 모든 것을 담아내는 소통의 장이다. 지난 9~10일 이틀간의 여러 학생들의 공연을 보고 있자면 요즘에는 어떤 가수가, 어떤 노래가 유행하는지, 요즘 우리들은 어떤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단 일주일의 시간이지만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학 축제. 함께 즐기며 모두가 하나가 되는 대동제. 나아가 모든 이웃을 둘러볼 수 있고, 함께할 수 있으며 사회에 대한 관심이 표출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축제가 우리들만의 놀고 즐기는 행사만으로 국한되지 않고 모두와 함께하며, 이 시간을 다함께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로 여길 수 있다면, 비로소 ‘대동’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것이다.

 

*강경대 군 사건 : 지난 1991년 4월 26일에 일어난 강경대 학생 사망 사건. 4월 24일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며 우리대학교 집회에 참석했던 명지대의 총학생회장이 학교로 돌아오던 중 경찰에 연행됐다. 이틀 뒤인 4월 26일 명지대 앞에서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위한 구출대회가 진행됐다. 시위대가 격렬해지자 경찰은 진압을 시도하고, 도망치던 강경대는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은 후 방치됐다. 얼마 후 다른 학생들에게 목격돼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목숨을 잃었다.

글 김광연 수습기자 yondo@yonsei.ac.kr
자료사진 연세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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