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필기를 보려고 공책을 빌려갔던 친구들이 외려 나에게 질타를 가한다. ‘야, 너 글씨가 이게 뭐냐? 알아 볼 수가 있어야지. 일부러 친구들 안 보여주려고 암호문으로 써 놓은 거 아니야?!’ 삐뚤빼뚤, 정신없이 꿈틀거리는 나의 글씨는 어렸을 때에는 선생님으로부터 지금은 친구들에게까지 질타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잘하는 것을 좋아하는 법. 그래서일까? 악필인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싫어하였다. 방학 숙제인 일기를 쓰기 싫어서, 미루고 또 미루다 개학 하루 전날 밀린 일기를 몰아 쓰려다 결국 미완인 상태로 그냥 제출을 해버린 것도 여러 번. 중, 고등학교 때에는 선생님 말씀 필기하는 것도 싫어,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항상 필기를 잘하는 친구들 공책을 복사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글씨에 대한 콤플렉스는 자연스레, 글쓰기에 대한 콤플렉스로 자리하였다. 학교에서 글을 쓰는 숙제가 나올 때면, 스트레스에 몸서리치곤 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물론 소신지원이긴 했지만, 논술이 없고 면접만 본다는 사실이 수시 지원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군대에서부터였다. 행정병으로 근무를 하여 컴퓨터와 일상을 함께 하였던 나는, 2년이란 무료한 시간을 이겨내기 위한 취미생활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행정병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거쳐 간다는 ‘한컴 타자연습’으로 쉬는 시간을 보냈다. ‘산성비’를 통한 정신없는 손가락 놀림은 200타였던 나의 타자 속도를 500타까지 끌어올려주는 쾌거를 이루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4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더 이상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책읽기와 글쓰기였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언가라도 얻어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마음에 나는 쉽사리 ‘글쓰기’를 목표로 삼을 수 있었다. 컴퓨터도 있겠다, 게다가 할 일이라는 것이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컴퓨터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치 뭇사람들이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쓰듯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글쓰기 연습을 위하여 시작한 ‘글쓰기를 위한 글쓰기’였다. 그러나 쓰면 쓸수록, 습관이 되면 될수록,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다른 누군가와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말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쓰기의 재미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하는 데에 있어 ‘말’의 한계를 느끼면서 더욱 가중되었다.

  소통이란 인간과 인간의, 혹은 인간과 다른 대상 사이의 부대낌 속에서 자연스레 생성되는 유기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는 소통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 가는 것을 기대한다. 아니, 나는 내 자신의 세계를 좁혀간다. 소통의 그 긴밀한 과정을 통하여 내 자신의 모습을 귀결시킨다. 이것은 흡사 조각의 과정과 같을 것이다. 거대한 돌덩이를 부수고 깎아내어, 그저 ‘가능성’이란 추상적인 말로서만 표현되던 존재의 흔적을 구체화 시키는. 나는 소통을 ‘정제’의 과정이라 표현하고 싶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정의하며 그것을 인지해 나가는 과정.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해주는 유일한 방안. 그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말로는 내가 바라는 소통을 이루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통감하게 되었다. 말의 휘발성은 타인에게 나에 대한 작은 얼룩과 같은 흔적만을 남길 뿐,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전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소통은 자기 자신을 내면화하는 과정과도 같다. 말을 통한 소통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까무잡잡하고, 쾌활하며, 조금은 어벙한’ 모습으로 밖에 정의할 수 없게 하였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 읽은 ‘나는 이러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이 시발점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온전한 나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픈 욕망, 그리고 온전한 나를 바라보고자 하는 욕망은 글쓰기를 통해서 밖에 충족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를 규정한다. ‘항상 웃고 있어 걱정일랑 없는 듯하고, 말도 많고 조금은 산만하지만, 예의 바르고 붙임성이 좋은 친구’ 나를 거대한 유기체 속 하나의 세포로 만들어 버리려는 듯,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본질을 규격화해 버린다. 거대한 렌즈 속으로 비추어지는 나의 모습을, 나의 존재의 단편적인 모습을 하나의 스틸컷 속에 담아버리려는 듯이.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비록 내 생각만을 휘갈겨 쓰는 두서없는 글들이지만, 글쓰기의 공간은 여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군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독후감 대회, 수필대회, 그리고 국방부에서 주최하는 병영문학상에서의 입상은 콤플렉스였던 글쓰기를 어느새 자랑스러운 하나의 취미로서 생각하게 하는데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제대 후, 맞이하는 두 번째 학기. 춘추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여자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연재였다.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어준다는 것. 나 자신의 틀을 점점 확장시켜 나가는 느낌과 점점 하나의 ‘나’로서 모습을 찾아가는 느낌. 한 학기를 마무리해 나가고 또한 연재를 마무리해 나가는 지금, 나는 새삼스러운 감회를 금할 수 없다. 글쓰기를 무엇보다 싫어했던 내가 학교를 대표하는 웹진에 글을 연재하다니. 물론 바쁘게 돌아가는 학기 중 스케줄에 원고를 써야한다는 압박을 받은 적도 없지 않고 때문에 늦은 원고를 보낸 것도 여러 번이지만, 글을 쓸 때에는 이 모든 것을 잊고 누군가와 소통하는 내가 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글이다. 글을 마무리하자니 진하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듯하다. 그래도 시작이 있으면 마지막도 있는 법. 수미상관의 원리를 맞추기 위해,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연재를 시작하게 해준 특정한 한 사람에게 보내는 글을 끝으로 이번 학기 연재를 마무리하려 한다. 글쓰기는 자신과 타인 사이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장이다. 나의 글이, 나 자신이, 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 속에 속해있는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가며 살아갑니다. 돈, 명예, 사랑, 우정… 이러한 가치, 목표를 추구해 나가는 삶 속에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며, 또한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 흘리며. 우리는 눈앞에 주어진 이 세상을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목표를 위한 삶. 어떠한 목표를 위하여 뜨겁게 노력하는 삶. 낭만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그런 삶. 물론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바쁜 일상으로 하루를 떠나보내고, 정신없이 다음 하루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상실감은 누구나가 느끼는, 감추려 애를 써도 자꾸 삐져나오는 필연적인 감각일 것입니다.

  목표를 위한 삶.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충족되지 않는, 갈망만이 존재하는 삶입니다. 목표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의 나날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갈증을 느끼곤 합니다. 그럼에도 마라톤 경기의 종착점에 골인하는 단 한 번의 순간을 위하여 항상 자신의 갈증을 꾹꾹 눌러 참고 달려 나갈 뿐입니다. 이들의 하루하루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매일매일은 인생의 목표라는 막연한 결승점을 통과하기 위하여 소모되는, 희생되는 날들이기 때문입니다.

  슬프지 않나요? 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어느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나만의’ 날들인데 말이에요. 우리, 생각의 틀을 약간 바꾸어 보아요. 우리가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밝게 빛나는, 우리의 소중한 나날을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 그 거대한 서사시의 대장정 끝에서 바라본 삶의 모습.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 그 중에서도 그림과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그림의 장르와 미적 가치는 개개인들마다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이 만들어지는 과정, 즉 우리의 삶의 그림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 하나하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은 모든 이들의 삶의 과정 속에서 동일한 양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날은 그림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점들입니다. 물론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진 완성된 그림에서 점 하나가 빠졌다고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나간 하루는 절대로 다른 하루와 같을 수 없기에, 대체될 수 없기에, 우리가 무시하는 점들 하나하나가 모여 그림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의 ‘하루’를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은 아무런 기억이나 추억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껴온, 다정하게 보듬고 마음을 실어온 그런 기억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우리는 매일을 가슴속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의미 있는 삶. 그런 특별한 날들을 추억하며 우리는 우리가 지내온 날들에 자부심을 느끼며, 또한 우리가 그려낼 총체적인 삶의 그림을 설레는 마음으로 그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가요? 저와 함께 삶의 나날을 추억하며 살아가시지 않겠어요? 가슴 속 빛바랜 앨범 속 한 장, 또 한 장 새로운 사진을 새겨나가시지 않겠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2011. 12. 5. 감성 충만한 새벽 2시에 꿋꿋한 솔방울이

글 센치한 솔방울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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