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지난 11월 14일 중앙도서관 앞에 붙은 ‘이별 선언문’이다. 선언문에는 우리대학교 장혜영(신방·06)씨가 ‘연세’와 이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대학보다 더 좋은 ‘그 무언가’를 찾아 떠나겠다고.

명문대생의 자퇴선언은 지난 2010년 3월 고려대 김예슬(25)씨, 지난 10월 서울대 유윤종(23)씨에 이어 우리대학교가 세 번째다. 김씨는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대학을 거부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유씨 역시 “대학 서열화와 입시위주의 교육을 반대한다”고 말하며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 우리대학교 장씨는 “학교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았다. 딱딱한 학벌 폐지론자가 아니라 단지 자유를 더 소중하게 생각할뿐이다.”라며 자퇴서를 붙이고 떠났다. 하지만 김씨와 유씨의 거창한 이유는 그렇다 쳐도, 장씨가 4년간 다닌 학교를 홀연히 떠나는 이유치고 이같은 선언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어느 날 교정에서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너무나 좁아보여서’, 혹은 ‘그저 여름이 가을로 변하듯 내 마음이 어느새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학교를 떠난다기엔 모호하기 그지없는 선언이다. 선언문을 다시 읽어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남자처럼 짧은 머리에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 스타일을 봐도 자유분방한 영혼일 것 같은 이미지를 솔솔 풍기며 장씨는 하나 둘 그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4학년, 졸업을 코앞에 두고 왜 자퇴를 했을까. 그의 자퇴 결심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저 드라마에 나오는 시나리오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선언문에 담긴 그대로, 날씨가 눈부시게 좋은 어느날 수업을 듣다가 창문밖을 바라봤는데, 사각 프레임에 담긴 하늘이 너무 작아 보였다. 넓고 파아란 하늘이 창문에 갇혀 있다고나 할까. 창문의 안이자, 그가 수업을 듣는 곳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창문의 밖, 그 따가운 햇살이 있는 저 바깥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놀라웠다. ‘명문대생의 자퇴’ 소식 치고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사유이지만, 오히려 그의 소신과 철학이 지나치게 뚜렷해 올곧아보이기까지 했다. 


‘연애’하는 마음으로

“모든건 연애하는 것과 같아요. 씨앗을 뿌릴 땐 그 씨앗이 10년 후 나무가 될거라고 보장할 수 없어요. 하지만 가능성이 ‘1’이라도 있다면, 그 ‘1’의 가능성을 믿고 애정을 갖고 노력하는 거에요.” 이어서 그는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을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존중하고, 애정을 갖고 관찰하고, 노력하는 거죠. 마치 모든 것을 애인 대하듯, 대하면 돼요.” 참, 도인같다. 신선같고 모든 걸 초월한 듯 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편안함으로 가득차 보였다. 하루하루가 경쟁의 연속인 다른 대학생들의 긴장된 눈빛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도(道)를 알기엔 어린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마디 한마디가 진심처럼, 그리고 진리처럼 들린다. 무엇이 그의 철학에 영향을 줬을까.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합장하듯 두 손을 고이 모으고 입을 뗀다. “제 평생의 스승은, 제 동생이에요.” 어릴 때 뇌성마비에 걸려 정신지체가 된 그의 여동생. 여동생이 장씨에게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정신지체의 가장 큰 난관은 감정표현을 할 수가 없다는 것.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 알 수 없다. 식사를 차려줘도 그게 맛있는지 맛없는지 조차 표현을 할 수가 없다. 그랬기에 장씨는 동생에게 최선을 다했고 그저 동생이 좋아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포용의 인내가 참 넓어졌다. 이 세상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사람들의 각기 다른 취향을 포용하기 위해선 ‘사랑’하고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장씨가 자퇴서를 낸 후 잘 되나 두고보자’, ‘그렇게까지 쿨해보이고 싶었냐’라며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그는 존중한다고 한다. “괜찮아요. 뭐 시를 읽는 마음… 이런 것처럼 그들도 존중하고 사랑하면 되니까요.” 그런 그가 ‘학업’과 사랑에 빠진 순간도 있었다. 


공부와 ‘사랑’에 빠지다

‘Carpe Diem!’ ‘순간을 즐겨라’라는 라틴어다. 장씨는 Carpe Diem을 모든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학창시절 그는 한국 애니메이션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실업계특별전형으로 우리대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 영상연출이라는 전공을 살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가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1학기 수시에서 쓴 맛을 보자 장씨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대학을 가지 말까.’ 하지만 이번 한번만큼은 세 딸을 힘들게 키운 아버지께 효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까지 3달이 남았다. 쿨하게 수리를 ‘버리고’ 1511111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2006년, 단 한명을 뽑는 실업계 특별전형으로 사회과학계열에 당당히 입학했다.

입이 떡 벌어졌다. “3개월 안에요?”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장씨의 답변이 인상적이다. “사랑에 빠지면 되요.” “네?” 기자는 더 당황했다. “사람과 사랑하듯이 공부랑 사랑에 빠지면 되요. 어렵다고 생각하면 끝도 없어요. 자기가 사는 그 장면, 그걸 즐겁게 만드는 건 자기 몫이잖아요.” 우리대학교에 입학해 1학년 때 우수한 성적을 거둬 4년 장학금도 받았다고 하니, 정말 공부와 빠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이 듣고싶은 과목을 맘껏들으며 또 한번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다음 ‘사랑’

그의 자퇴소식을 듣고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장씨의 미래계획. 최종학력이 이제 ‘고졸’로 마감된 장씨가 다음 선택할 일이 궁금하다. 결국 돌아온건 가장 그다운 대답이었다. “몰라요!” 희안했다. 학교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찾아서 떠나겠다는 것 아니었나? “대학을 다닐지 말지 고민하는 것은, 저한텐 양파링을 먹을까 새우깡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과 같아요. 의무나 부담이 아니라 선택일 뿐이죠. 가장 제가 원하는걸 찾아서요.” 하지만 철칙은 있다. 바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꼭 그 대상이 특정한 직업이나 일이 아니라도 좋다. 하루종일 앞에 커피를 두고 멍하게 있는 것도 괜찮다. “그림 그리기, 여행하기,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해요. 이걸 다 하면서 사는게 무엇일까 종합해보니 책을 쓰는 일이었어요.” 실제로 몇 년전부터 꼼꼼히 써온 블로그도 있단다. 그는 책 발간계획은 마냥 추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제를 알려달라고 슬쩍 묻자 “‘과외’로 할까 생각중이에요. 저는 학교 안보다 밖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학교 밖의 교육을 과외라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학교에선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에 대해 쓸 예정입니다.”라고 들떠 말한다. 그의 책 『과외』와 또 한번 사랑에 빠지며 독자들에게 그가 ‘과외’로 받은 사랑을 나눠 줄 것 같다. 연애관과 일치하는 세계관, 자신을,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법,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법,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법, 내가 하는 행동들의 계기는 있지만 이유가 없음을 인정하는 법, 그리고 찬란한 순간을 만끽하는법… 이런 것 들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읽은 당신들에게 ‘이별 선언문’에 나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나는 이제 연세가 아닌 다른 사랑을 향해 떠납니다.

재미없는 질문을 몇 개 남기고 싶습니다. 학우 여러분은 학교를사랑합니까? 예비 학우 여러분은 연세와, 아니 대학과 사랑에 빠져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지금 여기 있습니까? 혹시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정말 내일이 오나요?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 네 명의 해맑은 영국 청년들은 이렇게 노래해주었습니다.

ALL YOU NEED IS LOVE

모두 사랑하고 있습니까?

글 송동림 기자 eastforest@yonsei.ac.kr


**이별 선언문 전문 2011.11.15**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나는 06년도에 사과대에 입학한 장혜영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의 앞에서 공개 이별을 선언합니다. 나의 이별 상대는 여러분도 잘 아는 연세, 우리 학교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진리하고, 또 진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자유를 진리함이란 우리는 언제나 자유로웠으며 또한 계속 그러하리라 함을 깨닫는 것이고, 진리를 자유케 함이란 스스로 진실이라 믿는 바를 자유로이 펼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날개의 자유를 깨달은 새들이 하염없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새들에게 날개의 자유가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에게는 스스로가 믿고 사랑할 것을 선택할 자유, 그렇게 선택한 아름다움을 지켜낼 자유, 즉 사랑에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깨닫고 소중히 여겨야 할 진실에 가장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요.

문득 생각해봅니다. 만일 연세를 만나지 않았다면, 대학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모든 지점들에 닿을 수 있었을까. 이 느낌을, 생각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 눈 앞의 이 순간이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가슴 저리게 느낄 수 있었을까.

글쎄요. 아쉽지만 이건 그냥 과장된 강조의 수사입니다. 대학에 안 갔으면, 연세에 안 왔으면 또 그 나름 다른 무언가를 만나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다른 시간 속에 또 다른 느낌들을 가지며 살았겠지요. 우리가 사는 시간은 결코 역행하는 법이 없기에 '만일 내가 그 때 너를 못 만났다면' 같은 가정은 치사한 얘기입니다. 한편 가지 않은 길을 애써 폄하하며 상대적으로 현재를 비교우위에 놓아 보려는 시도 역시 참으로 안타깝고 볼품없는 사업입니다.

나는 지금 연세에게 천의 고마움과 천 하나의 아쉬움을 담아 담담히 작별을 고합니다.

고마워, 학교야. 근데 우리 이제 더는 아냐.

감히 말하건대 우리 연애는 연탄재 발로 차도 될 만큼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교정에서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너무나 좁아보여 나는 바야흐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연세와 깨진다 하니 주변에서는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다채로운 반응의 구절판을 맛보았습니다. 4년을 다녀놓고 이제 와서 아깝게 무슨 짓이냐, 조금만 참으면 그 또한 다 지나가는 것을, 혹은 네가 배가 불렀구나, 한국 사회에서 고졸로 사는 게 만만해 보이냐, 심지어는 그렇게 해서까지 쿨해보이고 싶냐는 소리까지도 들었습니다.

허나 이 이별에는 아무런 당위도 없습니다. 물론 핑계를 대자면 삼일 밤낮은 주워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안 들더라, 이런 줄 알았는데 저렇더라, 속았다, 지쳤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변심을 변호하기 위해 한 때의 연인을 깡그리 몹쓸 존재로 전락시키는 이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떠나는 까닭은 그저 여름이 가을로 변하듯 내 마음이 어느새 학교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마음이 학교를 떠난 이유는 또 다른 긴 사연입니다.

사랑에의 자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선배를 둔 우리가 사랑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 누가 한 점 부끄럼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나는 이제 연세가 아닌 다른 사랑을 향해 떠납니다.

재미없는 질문을 몇 개 남기고 싶습니다. 학우 여러분은 학교를 사랑합니까? 예비 학우 여러분은 연세와, 아니 대학과 사랑에 빠져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지금 여기 있습니까? 혹시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정말 내일이 오나요?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 네 명의 해맑은 영국 청년들은 이렇게 노래해주었습니다.

ALL YOU NEED IS LOVE

모두 사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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