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완연한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날선 추위에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괜스레 옷깃을 여미게 되는 그런 날씨입니다. 덩달아 옆구리도 시려올 때는, 떠나간 애인 붙잡지 못한 것을, 나 좋다고 쫓아다니던 그 사람 마다한 것이 새삼 아쉽습니다. 급기야 지난달 소개팅서 만났던 어장관리녀(남)의 어장속이라도 모른 척 들어갈 걸 싶은 마음까지 듭니다. 핸드폰을 뒤져봅니다만, 님 이라는 글자에 점하나가 찍혀 남이 된 여인네(남정네)들 뿐입니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추운 이 계절 가슴 속 냉기, 훈훈하게 데워줄 영화 한편 소개해드립니다.

전통적으로 <사랑은 비를 타고>(1952)와 같은 스크루볼 코미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남녀가 여러 가지 내외적 갈등을 겪지만, 극적인 내용 전개와 감동적인 에피소드에 의해 상황이 반전되고 사랑의 결말에 이르게 되는, 전형화된 공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 뻔하디 뻔한 로맨틱 코미디는 알맹이 없는 신파극과 통속극의 오명을 쓰고 소위 예술영화 불리는 장르들의 하류인 듯 취급되지만, 스튜디오 체제의 전성기 시절, 윌리엄 와일러(로마의 휴일)나 빌리 와일더(뜨거운 것이 좋아)에 의해 완성된 로맨틱 코미디는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꾸준히 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로 말할 것 같으면, 로또 맞은 사람이 벼락 맞을 확률과 비근할 우연의 연쇄나 출생의 비밀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어떻게든 그 모든 인과의 연쇄들이 두 남녀의 합일로 귀결되는 전개는 헤겔과 맑스의 목적론적 철학을 상회합니다. 세월이 흘러 잘생긴 왕자님은 돈많은 실장님으로 진화하고 어여쁜 집시공주는 억척스럽지만 순수한 현대판 신데렐라로 진화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입니다. 더러 남녀 간 위치가 역전되고 그들을 둘러싼 상황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기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본질은 쉽사리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맨스와 코미디의 장르적 친화성은 조금씩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우리 시대의 로맨스는 더 이상 유머와 위트로 포장되지 않으며 코미디 역시 시원한 파안대소가 아니라 자조의 쓴 웃음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특히 88만원 세대나 3포세대로 호명되는 우리 세대의 로맨스는 달콤하기 보다는 처절하기 까지 합니다. 취업 낙방과 함께 느닷없이 날아드는 이별통지서와 결혼정보회사의 등급별 매칭 시스템은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로맨스의 경제학으로 치환합니다.

견고하게 유지되던 로맨스의 공식은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장르 외부의 이질적인 것들이 로맨스의 공식을 새롭게 진화시킵니다. 잘생기고 예쁜 주인공들 대신 소외된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선형적인 사랑의 기승전결대신, 번번이 사랑에서 비껴나가고 사랑과는 관련 없는 파국적 상황들이 개연성 없이 출몰합니다.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지는 않는’ 비루한 로맨스는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말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음을 처절하게 극화하며 로맨스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킵니다. 장애인 여자와 모자란 남자의 사랑을 그린 <오아시스>나 다방 종업원과 순박한 농천 청년의 사랑을 그린 <너는 내 운명>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번 주 정기상영작인 <내 깡패 같은 애인>은 그런 로맨스 공식의 진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맞는데 이력이 났지만 곧 죽어도 폼생폼사인 건달 동철(박중훈)과 이력서만 수십 통째, 취업할 가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막장청춘 세진(정유미)이 우연히 한 건물 지하 셋방 이웃사촌으로 살게 되면서, 이상야릇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라면에 계란을 넣지 않는 것만 빼면 공통점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두 남녀는 처절한 생존의 틈바구니에서 부족하나마 따뜻한 체온으로 서로의 온기를 북돋습니다. 이 영화는 로맨틱한 대사도, 사랑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우아한 장면들도 없지만, 추운 겨울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그머니 손난로 하나를 건네는 그런 속 깊은 영화입니다. 겨울날씨만큼 꽁꽁 얼어붙은 마음 녹이고 싶으신 모든 분들 영화 보러 냉큼 오시기 바랍니다.

 

김호빈 (사회·05) / 멀티미디어 센터 영화 클럽‘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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