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색안경을 씌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색안경을 쓰고 살아간다? 삼단논법의 허점은 현대논리학에서 충분히 들어났지만, 나는 내가 도출해 낸 이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색안경을 말할 때 항상 '편견'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편견일 터, 더 크게 올라가 보자. 우리는 태어나고부터 지금 자신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발돋움해 나가기 위하여 컨베이어벨트의 등속에 몸을 맡긴다. 이 공정은 우리에게 효율적인 사회화를 약속하며, 내가 발 딛고 사는 이곳의 관습과 이념적 패러다임을 학습시킨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만의 특권인 이성적 사유는 그 사상의 틀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도록 교묘한 조작을 시행한다. 결과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뿌연 연기와 같은 관념들 뿐? 나는 관념론자는 아니다. (아니었으면 한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사회적 속성은 사회화의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관념론자를 찍어내는데 성공한다.
  나는 지성인이다. 적절한 온도와 정량의 비료, 그리고 아낌없이 듬뿍 뿌려진 농약으로 점철된 하우스 딸기와 같은. 나는 지성인으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도 하다. 지성인인 내가 감성적인 활동인 ‘봉사활동’에 끌리는 것은 말이다.

  ‘봉사활동이란 무엇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곤 하였다.

  ‘봉사란 교육이다.’ 나는 교육이란 '가르침'이 아닌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의 학생에 대한 가르침으로 일관하는 일변적 활동이 아닌, 교육활동의 두 구성원들이 서로 배움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쌍방향적 활동. 이 공간 속에선 모두가 평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누군가가 우월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그들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인정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통하여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 나는 교육이란 배움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봉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봉사는 봉사자의 일방적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활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봉사자와 그 수혜자. 봉사활동의 두 주체가 긍정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 따라서 봉사는 그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모두 겉만 번지르르한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봉사활동을 통하여 그 수혜자에게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봉사활동만이 진정한 봉사라 부를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으로 거창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모두 나의 머릿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이념에 불과할 뿐. 마르크스가 말했었지. 철학의 요점은 실천에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과연 나는 이러한 마음으로 봉사에 임하였는가? 아니, 부끄럽지만 나의 대답은 ‘NO’ 나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언제나 ‘연민’이라는 짧은 단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느끼는 '연민'이란 감정. 흔히 동정심이라 불리며, 타인을 도와주게 하는 가장 큰 기제로 작용하는 이 허구적 감정이 말이다. 연민이라 아름답게 진공 포장된 봉지를 한 번 까보자. 그 속에는 '나는 그들보다 나은 상황에 위치하고 있다'는 심리적 우월감이 거나하게 웅크리고 있다.

  그래, 봉사라는 활동을 통해 만족감을 채워주고, 나에게 또 다른 봉사활동을 찾아 헤매게 하는 것은 이 우월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감정적인 활동을 통하여 이성적 쾌감을 손에 쥐려고 하는 지성의 횡포. 나는 피라네시의 '상상의 감옥'에 갇힌 수감자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의미 없는 걸음걸이를 지속한다. 내가 이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아니, 나는 지난번 봉사활동에서 그 가능성의 편린을 보았다.

  ‘승가원’이라는 조그만 장애아동 보호시설에서의 봉사활동. 나는 봉사를 앞두고 전에 없던 두근거림을 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애' 그 두 글자 앞에서 나의 편협한 고정관념은 나의 태도와 감정에 지속적인 적신호를 보내었다. 윙윙, 비상벨을 눌러대는 이성과 잔뜩 긴장하여 오그라든 나의 신체. 승가원 시설 앞에 도착한지 많은 시간이 흘러가 있었고, 약속했던 시간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발걸음을 시설 안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너무 뻔한 모노드라마 같아 보이긴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도록 하겠다. 봉사기관에서 아이들과 마주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동안, 나의 이야기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급전'과 같은 맥락. 물론 나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서사구조에 만연하는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끝이 난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머릿속에 생각이 한 가득이었다.
  '혹시 말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나로 인해 더욱 상처를 받게 된다면?'
  '이 아이들을 대하는 데에는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학문적 접근이라도 하게 심리학 이론서라도 좀 읽어보고 올껄'
  그러나 나의 이러한 이성적 생각들은 곧 '쓸데없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상아탑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말의 의미. 장애인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학습하고 지속적으로 인지해 온 지금까지는 알지 못하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해맑은 웃음으로 자신의 기쁨을 마음껏 표출해 낼 줄 알고, 사람을 좋아하며, 또한 그 애정을 타인에게 표현할 줄 아는, 그들 역시 ‘장애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부끄러워 할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에 의하여 '자기 스스로가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자',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픔을 이겨낼 수 없는 자'가 나누어지지만 그 모두가 '아픔'을 가슴 한 구석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연민에 의한 선행은 동정심이란 감정을 매개로 하여 자신이 타인보다 더 나은,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나는 이것이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경우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아픔을 망각하고 있는 자들, 자신의 아픔을 타인의 아픔으로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자들의 행위인 것이다.

  용기 없는 행위. 자신의 추함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두려워 거울을 멀리하는 비겁자의 행동방식. 지성인의 탈을 쓰고 있는 나는 아직 감옥에 갇힌 수감자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나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게 된 지금,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 나의 형량은 대폭 감소하여 무기징역에서 이제 한 10년 형으로까지 줄어든 듯하다.

  긴장의 곡선은 이제 수평의 직선으로 수렴되고, 나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확실한 결론은 내려진 것이 없는 상태. 이러한 열린 결말은 나에게 이야기의 행방이 앞으로 어느 쪽으로 치닫게 될지 끊임없이 상상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지금 이 이야기는 내 삶 속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미명하에 다시 태어날 것이란 사실. 따라서 나는 되도록 수미상관의 원칙을 따르려 노력해 보려고 한다. 이야기의 교훈을 가슴에 새겨, 삶 속에서 만들어나갈 이야기의 후속작에서는 내가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겨 보일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는 희극. 새로운 행로의 서막. 나는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생애 ‘첫’ 봉사활동을 수행해 내었다.

글 센치한 솔방울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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