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향기 #5


불교 사찰 중에는 석굴 형태의 사찰이 있다. 자연상태의 암벽을 뚫어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모셔 조성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석굴 사원은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사암(沙巖)이 높은 층을 이루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많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습도가 높고 암벽도 대부분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중국이나 인도처럼 자연 상태의 암벽에 석굴을 파서 사원을 조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돌을 쌓아서 인공 석굴을 만들어 사찰을 조성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경주에 있는 신라 석굴암(石窟庵)이다. 석굴암 역시 토함산(吐含山) 중턱을 깎아낸 뒤 돌로 돔 형태의 인공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모셔 만든 것이다. 이러한 석굴 사찰의 명맥은 신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시대 유적인 충주의 미륵리 절터(미륵리 사지)가 그 중 하나이다.


미륵리 절터에 들어서면서 가람배치를 보면, 정문과 탑, 석등, 법당이 일렬로 배치된 전형적인 일탑식 가람배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찰에서 법당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달리, 미륵리 절터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를 두고 북진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고려의 야심을 보여준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이런 해석은 견강부회에 가깝다고 본다. 차라리 산지에 지어진 사찰이라 지형적인 제약이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당간지주로 사용되었던 석물과 함께 돌거북이가 눈에 뜨인다. 거북이의 등에 패인 홈을 보면 아마 이 거북이는 비석의 받침대인 귀부(龜趺)로 사용되었을 것 같다. 원래 귀부는 거북이가 아니라 거북이 모양의 용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등딱지는 거북이어도 머리와 발은 용의 그것이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 귀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북이일뿐더러, 등딱지 한 켠에는 숫제 아기거북이까지 조각해 놓아 애 딸린 거북이로 만들어 놓았다. 아마 별도의 돌을 가져다 조각한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바위를 그대로 조각해서 귀부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흐트러진 양식을 보이는 이유는 아마 이 사찰이 고려의 입장에서 중앙의 영향을 많이 받지 못한 지방 사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거북을 지나쳐 걸어가면 우람한 5층석탑 하나를 맞닥뜨리게 된다. 이 석탑 역시 돌거북처럼 원래 있던 바위를 대충 다듬어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을 올린 특이한 탑이다. 전체적으로 옥개석(지붕돌)과 면석의 비율이 작아졌고 솜씨가 투박하긴 하지만, 신라 후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그래도 힘차게 생긴 고려 중기의 탑이다.


가람배치상에서 석탑 바로 다음에는 응당 석등(石燈)이 나와야 한다. 이번엔 제대로 석등이 하나 있다. 그 뒤로 이 절터의 주인공인 석불과 마주하게 된다. 사찰에 있는 불상은 대개 나무로 지은 법당 안에 안치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절의 법당은 나무로 짓지 않았다. 대신 산 언덕을 ㅁ자로 깎아내고 돌을 쌓아올려 삼면의 벽을 만든 뒤, 그 위에 지붕을 덮어 법당을 만들었다. 지금은 법당을 덮었던 목조지붕과 기둥은 없어져 삼면의 돌방 안에 부처가 서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런 형식을 살펴볼 때, 이곳의 법당은 돌로 인공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는 한국식 석굴 사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미륵리 사찰은 과거 신라시대 석굴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공 석굴 안에 있는 돌부처는 높이가 10m도 넘는 거대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서너 개의 큰 돌을 잇대어 큰 규모의 부처를 만든 불상이다. 부처의 몸통은 거칠고 투박하게 조각되어 있는 반면, 부처의 얼굴 은 몸체와는 달리 상당히 많은 공을 들여 조각해서 기이한 느낌을 준다.


미륵리 절터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몇 없는 ‘진짜 절터’였다. 복원된 사찰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황량함과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인적 없는 절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 이 안에 웬 요즘 사찰이 하나 들어서있다. 돌거북 앞에는 무슨 생각인지 시주함을 가져다 놨고, 거북 위에는 사람들이 던져놓은 동전들로 가득했다. 게다가 컨테이너 박스로 가건물같이 대웅전을 만들어 놓았고, 석불 앞에는 불단과 시주함이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은 불상 앞에 매트를 깔고 연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어디에 설치했는지 스피커에서는 끊임없이 염불소리가 흘러나왔다. 옛날의 고즈넉함을 찾아보기 힘든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절터를 그냥 그대로 놔둘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우군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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