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기 위한 끝없는 여행의 편린

 ‘내 취미?, 내 취미는 축구하기, 노래부르기, 그리고... 산책하기야.’

  거뭇하고 점잖지 못하게 생긴 얼굴 때문인지 까불까불 장난끼 많고 쾌활한 모습 때문인지, 내가 산책을 취미로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모두들 ‘농담이겠지’하고 웃어넘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자랑거리도 아닐뿐더러 산책의 진정한 묘미는 혼자서 거리를 걷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산책이 가져다주는 고독하지만 즐거운 사색의 시간을 좋아한다.

  알록달록 가지각색으로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점점 더 서슬이 퍼래져가는 차가운 바람에 하나 둘 떨어지는 그런 날. 시간은 초저녁의 어스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마치 엘라스틴을 한 듯 윤기 있는 머릿결을 흩날리는 한 여성이 걸어간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맞으며, 떨어진 나뭇잎을 밟으며. 마치 그 세계에 자신 혼자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홀로 천천히...
  외로운, 쓸쓸한, 고독한, 감성적인, 낭만적인 모습. 아마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산책’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러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편견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내가 산책을 취미로 한다고 말하면 모두에게 비웃음을 사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나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마음대로 나를 판단하는 것일까? 왜 다른 이들은 내가 지닌 모습의 일부만을 인정하는 것일까? 나는 왜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 이러한 일련의 보이지 않는 질문들이 내 머리 속에 똬리를 틀며 나를 답답하게 하였다. 그러던 차에 내가 접하게 된 책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퍼레이드’이다.
  어떠한 대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그 대상만을 보게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퍼레이드’는 나의 관심의 피해자들이었다. 나는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두 권의 책 속에서 내가 관심이 있는 부분들만을 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맙게도 나의 사색의 산책에 기꺼이 따라 나와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선과 악. 옛, 고전의 글들이 즐겨 다루던 원론적,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오랜 옛날부터 선과 악을 철저히 나누어 생각해왔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하느님과 마귀, 부처와 번뇌. 철저한 선, 악의 구분은 ‘권선징악’이라는 사상적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하나의 커다란 모토는 전쟁에 정당성을 심어주었으며, 우리 편은 착하고 너희 편은 악하다는 식의 전형적인 한국식 이기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선과 악은 분명히 전혀 다른,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두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인간’을 통하여 발현된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분모를 통해 우리는 ‘선과 악’은 비록 섞일 수는 없지만 인간 속에 혼재해 있으며, 인간이 가진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이 모두 ‘나’라는 깨달음을 창출할 수 있게 된다. 선과 악의 철저한 구분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인 ‘지킬박사’의 양면적 모습을 통하여 중대한 도전을 받았으며, 이러한 시각의 차별화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이를 일으키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선과 악’이라는 커다란 기둥을 통해서만 인간을 바라보았기에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풍부한 내면에 대하여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착하지만 까탈스러운, 악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순수한, 착해보여도 사실은 탐욕스러운.’ 인간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다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면성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닌 ‘나와 너, 우리’라는 개개인의 모습을 인정하게 하고, 비로소 그를 탐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다.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에서 나는 생소한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Multiverse’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세계에서는 누구나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는 이러한 개개인들의 세계가 혼재하고 있는 왕국, 즉 ‘다수의 우주(Multiverse)’가 된다. 개인주의적 사고관의 발달을 통해 발현된 이러한 사고는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돌리게 하였으며 우리들은 누구나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삶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과 더불어 우리들 자신에 대한 탐구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사회라는 집합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하나의 원소들이기 때문에 생성된 장애이다.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하여 탐구하기를 갈망하는 나에게 다가온 커다란 장애물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 세계는 누구나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없이는 그들의 연극을 원활하게 이어나갈 수 없다. 이것은 좋은 영화에 좋은 조연들이, 엑스트라들이 필요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의 삶은 한편의 영화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의 총체적인 삶은 주연과 조연이라는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영화와는 달리 주연과 조연이 명확하지 않다. 한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이 주연, 조연, 또는 엑스트라로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세계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라는 영화에서의 자신의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기 위하여 그에 알맞은 가면을 쓰며 살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며 타인의 존재,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은 ‘자신’이라는 하나의 존재에서 끝나지 않으며 타인의 ‘타인’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개인적은 삶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다른 이와의 상호작용, 즉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밖에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를 이루기 위해 누구나가 자신만의 가면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괴리를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하여 만들어낸 자신의 외면적 모습. 우리는 우리의 여러 가지 가면들을 번갈아 써가며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두터워진 가면들 속에 점점 숨겨지는 우리의 내면. 이것이 현대인들의 외로움, 고뇌의 근원이라 생각한다. 타인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는 비극. 우리는 풍족함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갈망하는 갈증을 느끼고 있다.

  나는 항상 자아 정체성을 찾는 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생각해왔다. 특히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 수강한 ‘인간발달과 교육’이라는 수업에서 던져진 ‘나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통하여 나의 관심은 심화되었다. 하지만 두터운 나의 가면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장애물로 작용했다. 나는 이런 가면을 벗어 던지고 싶지만 가면은 벗겨지지 않는다. 이 가면은 이미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산책과 사색을 좋아하는 나는 까불까불, 촐랑대는 모습의 나에게 가려져 다른 이들이 나를 파악하는 데에도, 또한 내가 나를 파악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끝없이 나를 찾기 위한 사유의 여행을 떠날 것이다. 비록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나의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그리고 ‘퍼레이드’와 함께한 오늘의 산책은 나의 끝없는 여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다음의 산책에서 나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다음에는 누가 산책에 동반하여 나의 여행을 풍요롭게 해줄까? 끝없는 기대감에 나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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