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장편소설

삶을 글로 배웠습니다


책을 읽으면 하느님과, 소크라테스과, 과거의 위대했던 죽은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으며, 있었을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우주함대, 온갖 변태적 행위를 일삼고 즐기는 남성들/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기를 수 있으며, 그 밖에 있을 지도 모르는 삶의 선물들을 마음껏 즐길 수도 있다. 위대한 삶의 선물 따위가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토익 책이나 미적분학 책을 열심히 읽으면 토익 점수와 학점이 어느 정도 올라갈 것임은 분명하다. 분명히 책 속에 길은 있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세대’라는 지점을 한 번 거친 것은 확실하다. (솔직히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보아야 할 책 또는 보고 싶은 책이 없을 때에는 보통 컴퓨터를 켜서 글을 보았다. 그러지 않을 때에는 영화관에 영화자막을 보러 가기도 하고,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을 때에는 디씨인사이드나 루리웹등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고정 닉네임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다. 와이섹에서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쪽글을 확인하고, 자기 글을 쓰고, 3~4줄자리 덧글을 달면서 ‘나는 이걸 하면서 학습을 하고 있는거야.’하고 자기최면을 거는 때도 많이 있었다. 그러면서 글이 써지지 않을 때에는 키보드를 아무 의미없이 누르다가 백스페이스를 몇 초동안 누르고, 눈을 한 열 번쯤 비비다가 다시 글을 쓰는 것에 몰입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글에 몰입하고 있는 지 아닌 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창의력을 발산하고 있건 싸이 방명록을 뒤지고 있건 키보드와 마우스를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는 것은 똑같지 않은가. 그러다가 다리에서 진동이 느껴지면 핸드폰을 꺼내들어서 다시 글을 보고, 글을 쓴다. 핸드폰에서도 어쨌거나 흰 바탕에 검은 글자가 나온다.


글 따위......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가 쓴 자서전으로 되있다. ‘나’는 어려운 단어와 글, 자연과 우주의 신비, 특히 부처를 좋아한다. 주인공 ‘나’는 광산을 개발하러 크레타 섬으로 가려고 한다. 거기에 웬 쭈글쭈글한 노인이 와서 같이 데려가 달라고 말을 한다. 자신은 매우 맛있는 수프를 끓일 수 있다고 말한다.

 

▲ 이 책은 예전에 영화로 나왔었다. 왼쪽이 주인공, 오른쪽이 조르바. 조르바는 이래뵈도 환갑이 넘었다. 조르바는 주인공을 ‘두목’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왜요>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중략)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라고 말한다. ‘나’는 조르바를 크레타로 데려간다. 사실 가서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주인공에 의하면, 조르바는 빵, 여자, 술, 힘든 육체 노동으로 매일매일 알차게 살면서 십년 넘게 종이와 씨름해온 주인공보다 ‘더 철학적인’말들을 내놓는다.
뭐, 그의 어록을 보자.

‘두목, 여자가 혼자 잔다면 그건 우리 남정네들의 잘못이에요. 우리는 최후의 심판 날에 우리가 한 짓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가 얼마 전에 서로 얘기했다시피 하느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들 몫의 스펀지를 준비하고 계시지요. 그러나 그 죄만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여자와 잘 수 있는데도 자지 않는 사내에게 화 있을진저! 남자와 잘 수 있는데도 안 자는 여자에게 화 있을진저!’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번 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하느님은 꼭 구름 같은 스펀지 한 덩어리를 들고 있을 거에요. 오른쪽에는 천당, 왼쪽에는 지옥. 이윽고 혼령이 하나 들어옵니다. 가엾게도 이 불상한 것은 옷(그러니까 육신 말이오)을 잃어버려 오들오들 떱니다. 하느님은 그걸 보시면서 팔 소매로 웃음을 가리고 요괴 역을 연기하십니다. 이렇게 호령하시는 거죠.
<이리 오너라, 이 거지 같은 자슥아!>
이윽고 하느님은 문을 시작하시지요. 발가벗은 혼령은 하느님 발 밑에 몸을 던지고는 애걸복걸합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죄를 지었나이다.>
혼령은 자기 죄를 밑도 끝도 없이 조목조목 외어 나갑니다. 하느님은 심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하품을 하십니다. 그러고는 꾸짖으십니다.
<제발 그만둬! 그런 소리라면 신물이 나도록 들었다.>
그러고는 쓱싹쓱싹 물 묻는 스펀지로 문질러 죄를 몽땅 지워 버리시고 혼령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천당으로 썩 꺼져라. 여봐라, 베드로. 이 잡것도 넣어줘라!>

등등을 말한다. 그에게는 남이 철학적이고 심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석탄을 캘 때에는 그에게는 석탄과 광맥만 보이며, 밤에 술을 먹으면서 여자를 꼬실 때에는 눈 앞에 자신의 여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레를 돌리는데 새끼손가락이 방해되어 잘라버리고, 흰 종이 속에 깨알같이 담겨있는 부처님 말씀을 사랑하는 두목을 인간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책을 태워버리자고 말하는 등, 그는 확실히 약간 이상한 사람이지만, 멋있는 사람이다.


조르바가 될 수 있을까?


정말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5가지 이내-술, 여자 혹은 남자, 밥, 그리고 노동-일지도 모른다. 책 뒤에 있는 정답을 내놓기 위해서, 교수님이나 네티즌들의 입에 맞춘 적절한 글을 내놓기 위해서 작은 화면을 눈앞에 두고 손가락운동과 뇌운동을 열심히 하는 다수의 우리들을, 조르바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카르페 디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고 모든 감각과 몸 전체를 사용해서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조르바를 부러워한면서, 자신은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자책하거나 앞으로는 좀 더 현실에 몰입해서 충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조르바는 정말로 멋진 사람이다. 하지만 가끔씩 조르바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결국 내가 ‘조르바의 말을 듣고 있는’행동도도 종이 위에 써져있는 선과 점들을 읽고 머리 속에서 망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글씨를 보면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머리에 쑤셔 넣을려고 낑낑대고, 또 그것을 어떻게어떻게 정리해서 다시 글로 내놓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보려고 하는 책에서는 ‘그딴 뻘짓 따위 집어치우슈’라고 50페이지에 한번 정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살짝 머리가 멍해질 때가 있었다. 나도 주인공도 분명히 조르바를 동경하고 있고 그처럼 살기를 원하지만, 정작 우리들이 하고 있는 짓은 조르바와 반대되는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내가 정말 조르바처럼 살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의심도 들었다. 자유인이란건 정말 멋있는 것인가? 키보드와 모니터에 얽매여 사는 것도 충분히 멋진 인생 아닌가?


펜대 운전사에게 지옥이 있으리


조르바는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과 헤어지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이런 전보를 붙인다.
<멋진녹암(綠岩)을찾았음.즉시오시오조르바>
주인공은 대공황을 지내고 있었다. 조르바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르바에게 가지 못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자 조르바는 이렇게 답장한다.

두목, 이런 말을 해서 어떨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가망 없은 펜대 운전사이올시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그 아름다운 초록색 돌을 봐야 하는건데, 당신은 보지 않았어요. 젠장, 일이 없을 때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나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는 두목 같은 펜대 운전사에게는 지옥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크윽. 지옥이 있다면, 주인공과 함께 나도 딸려갈 것이다. 다행히도 나와 같이 가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 같아서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 회에는 『생활의 발견』,(영화, 홍상수 감독)에 대한 연재가 진행됩니다.

심심풀이  yondo@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