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현의 '요맘때' 제10화

살이 좀 쪄서 걸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걸으면 이래저래 핑계대고 얼마 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함께 걸을 사람을 찾았다. 전화번호부를 계속 내리는데 딱히 문자를 보낼 사람이 없었다. 순간 이상했다. 벙쪘다. 저장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누구나 대학에 와서 인간관계에 대해 한번씩은 재고하는 것 같다. 갑자기 지나치게 비대해져 버린 인간관계의 크기, 비대해진 크기에 비례해 얕아진 듯한 인간관계의 깊이.
달라져버린 인간관계의 크기와 깊이 두가지가 모두 신경 쓰인다.

 

크기에 적응하기

처음.
감당하기가 힘들다. 핸드폰 전화번호부가 터질 것 같다. 메신저 스크롤바를 내리는데 하루종일 걸린다. 저장되어있는 박해일이 같은 조모임 사람 박해일인지 미팅 나가서 썸씽있다 영화한 편 보고 연락 끊긴 박해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미팅이었는지 소개팅이었는지도 헷갈린다. 발표준비 때문에 연락을 해야 되는데 연락을 할 수가 없다. 일단 둘 다 문자를 보낸다. 뭐라고 보내지...일단 연락한다.
-저기요~
둘 다 답장이 없다. 불안하다.
한참 뒤 답장이 왔다.
-?
-누구?
망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나중.
점점 커져 가는 전화번호부가 이제는 익숙하다. 이제 더 이상 핸드폰에 이름을 그대로 저장해 두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이름 앞에 무조건 수식어를 붙인다.
박해일은 더 이상 박해일이 아니다. '조모임박해일'이거나 '미팅박해일'이다. 네이트온 그룹설정은 기본이다.

 

깊이에 적응하기

처음.
오랜만에 보는데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분명히 밥은 한번 먹은 것 같은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는 나름 재밌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이 뒤에서 욕을 잘한다는데 불안하다. 내가 저번에 혹시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까? 신경 쓰인다. 인사를 앞으로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녁에 갑자기 카톡 떴다. 그 사람 이다.
'저..혹시 과제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ㅠㅠ'
싫은데? 안했다고 뻥쳐야지.

나중.
저 멀리서 그 사람이랑 비슷한 실루엣을 비추는 사람이 다가온다. 핸드폰을 꺼낸다. 보는 척 한다.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사진첩을 돌려본다. 발걸음 소리가 커진다. 지나간다.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편하다.

익숙해지면 별거 아냐.

처음에는 이래저래 짜증나고 싫고 실망하고 신경 쓰였다. 대학에 다닐수록 인간관계 역시 관리대상 중 하나라는 것을 느낀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와 다르지 않다. 너무 기대하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말고, 감정조절 잘 하고 생각하며 대해야 하는 것. 인사만 하는 사이가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리고 그것마저 없으면 아쉬울 테니.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듯한 그 사람 싫지만 사실 나도 필요할 때 아니면 연락 안한다. 대학스타일의 인간관계 어렵지만 나름 재미있다.

조소현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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