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세상을 담은 사나이, ‘시쓰는 김경주’를 만나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분 휘파람이 바람이 돼 이 세상에 잔존하다가 10년 후 내 자식의 살갗에 그 휘파람이 스친다면 기분이 어떨까. 벽면에 못을 박았는데 그 못이 벽을 뚫고 들어가 반대편으로 뾰족하게 나온다면, 앞에서 본 못과 뒤에서 본 못은 같은 못일까 다른 못일까.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속성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전달한, ‘기형’과 ‘시차’의 대가 김경주 시인을 만나봤다. 
 


Q. 다이나믹한 삶을 사셨다고 들었어요. 인생 얘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시인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도 궁금하고요.
A. 일단 시인은 직업이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시인은 직업이 아니고 예술가라는 속성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전 제 입으로 시인이라 말하지 않고 항상 ‘시쓰는 김경주입니다’ 이렇게 소개합니다. 시를 왜 쓰기 시작했냐고 묻는다면 복잡합니다. 물리적인 시간만 따진다면, 군대 가기 전까지 ‘양아치’처럼 살다가 제대 후 어떻게 살까 고민하던 중 연극을 하다가 시를 접했고 그에 매혹됐다고 할 수 있죠. 꼭 시인이 되려고 한건 아니에요. 시 외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희곡, 뮤지컬, 공연 기획 등 그쪽 관련해선 웬만한 일은 다 해봤죠.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djddlove?Redirect=Log&logNo=80128193768

Q. 제가 마광수 교수님의 야설 쓰기 과제 때문에 요즘 고생하고 있습니다. 야설 작가로도 활동하셨다고 들었는데 몇 작품 봐도 될까요?
A. 안돼요. 제가 싹 다 수거했습니다. 아마 이제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거에요. 데뷔했는데 야설 작가로 산다는건 쉽지 않아요. 악마의 유흥으로 판매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야설 작가 외에도 유령 작가 생활 오래했습니다. 전 소위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거쳐서 대필도 많이 했었죠. 웬만한 연예인들 엑스파일 제가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카피라이터 특채를 받아서 일년 반 동안 넥타이를 매본 적이 있어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제 평생 다시는 직장을 다니지 않기로 결심하고 ‘츄리닝 바람’을 기획했어요. 이들과 밴드도 하고 영화도 찍으면서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했는데 소위 마니아 군단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계기가 됐죠. 아마도 제 첫 작품이 1만 부 이상 팔린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죠. 그렇게 데뷔 후 화려하게 살다가 시의 제작력으로부터 너무 벗어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첫 시집에 대한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Q. 두 번째 시집인 『기담』은 난해함 때문에 독자와 소통이 단절된 시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시와 독자의 소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A. 현대 작가와 시인의 난해함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아인슈타인의 공식이 난해하니까 나쁜건가요? 난해하다는 것이 어떻게 윤리적인 기준이 될 수 있겠어요. 시가 좀 난해하다고 소통을 부정하고 있다며 젊은 시인들을 매도하는건 옳지 않아요. 난해해 보이는 이유는 현대 시의 양상이 알레고리적 구조라서 그런 거죠. 예술의 가장 중요한 면인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독자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거든요. 사실 우리가 너무나 드라마적 감성에 익숙해져서 조금만 상징해 놓아도 그걸 벗겨내질 못해요. 디카로 사진을 촬영하면 곧바로 확인하잖아요. 내가 보는 것을 찍고 그것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가 인화하고 난 후,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찍어서 나온 결과물에 대한 괴리감, 그 자체에 대해 감탄하는 자세, 그 자세를 잃은지 오래죠. 상상력과 실제 매물 사이의 시차를 감탄해야 하는데 안타까워요. 마찬가지로 드라마적 감성에 익숙해진 우리는 시의 난해함을 소통 부정이라 판단해 버려요.


Q. 현대 시가 갖는 난해함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도 결과적으로 소통 부정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는 또다른 폭력이 아닐까요?
A. 우리 시대는 지나치게 서정시를 중요시 했어요. 오히려 그것이 폭력적인거죠. 매 해 한국에서는 노벨 문학상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만약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아마도 시 부문일 것이지만 절대 한국이 받을 리는 없을 거래요. 이상에서 대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한국 근현대사적인 문제 때문에 사이키하고 몽환적인 시가 들어오는 게 현실상 힘들긴 했죠. 하지만 다행히도 2000년대 많은 시인들이 나타나면서 다시 이런 기형성이 부활하기 시작했어요. 기형을 바라보는 자세, 그 기형은 환원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를 담고 있는 거에요. 예술은 기꺼이 기형에 주목해야 합니다. 반가운 현상이죠.


예술가들의 혼이 담긴 홍대 '이리까페'에서 만난 김경주 시인


Q. 그렇다면 결국 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A. 시는 논리가 아닙니다. 느낌표의 세계이지 마침표의 세계가 아니거든요. 시는 논리 너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코 모범 답안을 찾는 영역이 아니에요. 원인에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플롯이라는 장르들은 시작부터 목적까지 범위를 찍어줘야 해요. 정확하게 10분이 지나기 전에 사건이 터져줘야 하고요. 하지만 시는 이미지의 개연성이 없습니다. 서로의 합의 하에 상을 잡아가는 것이죠. 가장 폭력적이지 않은 분야에요. 라디오를 켰을 때 99.999까지 치크치크치크 하는 소리, 100이 되어 칙! 하기 전까지의 그 모든 소리가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의미가 없을 순 없거든요. 시란 그런겁니다.


 
글 김유빈 기자
eubini@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