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글씨’쓰는 사람들, 서우회

꽃샘추위가 몰려오던 어느 3월의 오후, 동아리 ‘체험’이라는 과업을 등에 업고 대강당 안에서도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105호 동아리실로 향했다. 과거에 한 동아리 방에서 황량한 가구들과 뿜어져 나오는 담배냄새에 경악한 적이 있어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아무리 서예를 하는 우아한 동아리라 해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서우회 입구


고즈넉한 오후를 닮은 동아리, 서우회

‘서우회’ 동아리방 입구는 마치 창고 같다. 문 바로 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책장에는 정체모를 파일들이 쓰러져 자고 있고, 먼지의 양으로 봤을 때 묵은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어쩐지 입구만 봐도 문을 열기 두렵다고 생각하면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온건 아닐까 싶은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내린다. 일부러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커다란 창문에서는 ‘딱 좋은 느낌’의 빛을 책상 위로 내리쬐고 있다. 밝고 따뜻하다. 창백했던 창고의 이미지와는 달리 서우회 동아리실 문을 열자마자 느낀 것은 그러한 감정이었다.
예쁘게 빛바랜 한지 같은 느낌의 동아리방, 그 한쪽 벽면에는 서우회 부원들이 습작한 종이가 줄에 걸려 있고 또 한쪽 구석에서는 먹을 가는 기계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먹을 빙글빙글 돌려대는 기계의 ‘철그덕’하는 규칙적인 소리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한 동방을 그나마 소란스럽게 한다. 창문 앞 라디에이터에서 나오는 온기, 그리고 창문의 빛으로 온 동방이 따뜻하다. 딱, 고즈넉한 오후의 느낌이다.

‘철그덕’하는 소리가 나는 신기한 기계


초보에게도 어렵지 않아요

그 가운데서 서우회 부회장 김용우(토목?10)씨는 한지를 펼쳐놓고 뭔지 모를 글자를 쓰고 있다. 이날은 수요일이라 김씨는 선생님께 검사 받을 ‘숙제’를 한 번 더 점검하는 것이다. 서우회는 매주 수요일 낮 5시 전문 서예 선생님께 지난 서예 연습 검사를 받고 공부할 체본*을 받는다. 그 일과가 끝나면 부원들끼리 뒷풀이를 하지만 그 외의 날에는 따로 정해서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아리방은 연습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언제든지 열려있어서 글씨를 쓰고 싶으면 일주일에 몇 번씩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찾아가면 된다. 또, 서우회 싸이월드 클럽에 공강 시간표를 올리면 시간표가 맞는 사람들끼리 서예를 연습할 수 있도록 짝을 지어준다. 숙제라고 하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만 시간을 할애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분량을 준다.

서우회의 부회장 김용우 씨.



서우회의 부회장이면 얼마나 잘 쓰는 걸까 싶어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글자 모양이 뭔가 묘하다. 그러고 보니 벽면의 한지에 적힌 한자도 뭔가 지렁이 같다. 서우회 회장 홍선아(화공생명?10)씨는 “서우회는 보통 ‘지렁이 같은 글씨’라고 불리는, 갑골문자에서 발전된 ‘전서’를 가장 기초로 배운다”라며 “전서*를 다 쓰면 예서*, 예서를 다 쓰면 해서*로 넘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홍씨에게 어느 정도 쓰냐고 묻자, 연습을 별로 못한 탓에 몇 개월이 지나고서야 해서를 떼고 예서를 쓰게 됐다고 울상을 짓는다. 회장 정도면 서예의 대가일 것 같지만, 사실 홍씨도 서우회에 들어와서야 처음 붓을 잡았다. 다른 많은 부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붓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서예가 시곡 선생님과 함께

시곡 선생님과 서우회 신입 회원들.


그러한 ‘생 초짜’들은 수요일 낮 5시마다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매주 새롭게 태어난다. 서우회의 서예를 봐주러 오시는 선생님은 ‘시곡’이라는 호로 불리우는 서예가 김홍규씨다. 서우회가 처음 생길 때부터 꾸준히 부원들의 서예 실력 향상에 도움을 주셨다. 그래서인지 시곡 선생님에 대한 부원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몰랐는데, 시곡 선생님이 네이버에 이름을 치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이시더라구요”라고 했다. 실제로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그의 신문기사까지 나온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신입 부원으로 위장해 시곡 선생님의 글씨를 보니 과연 탄사가 나올 만큼 시원시원하고 깔끔하다. 붓 잡는 방법을 모르던 부원도 들어 올 수 있다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시곡 선생님의 지도를 받는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글씨를 잘 쓸 수 있게 될 것 같으니 말이다.

글 서(書), 벗 우(友). 서우회(書友會)

직접 써보는 기자


서우회 회원들의 권유에 기자도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한지 위에 한 자(子), 한 자(子) 써봤다. 회장님께 붓 잡는 법과 쓰는 방법을 전수 받았건만, 가로 줄 한 줄 긋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세로 줄, 가로 줄, 그리고 ‘공 공(工)’자까지 쓰고 나니 대단한 일을 한양 뿌듯하다. 조악하지만 정직하기 그지없는 글자들, 서예를 하면 자세도 좋아지지만, 무엇보다 집중력이 생기고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회장님의 말씀처럼 왠지 마음까지 바로 잡아지는 것 같다.
‘서(書)’라는 것은 무엇인가.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서(書)’는 바로 그 사람과 같다, 즉 서(書)를 통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단 말이다. 시곡 선생님이 서우회의 신입생들에게 들려주신 서예 입문서와 같은 말씀들. 늘 그런 말씀들을 들어왔기 때문일까.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해준 서우회 회원들 모두가 서예처럼 곧고 맑아 보인다.
시곡 선생님의 말씀을 새기며 서우회 동아리 실을 나오는 길, 시곡 선생님의 말씀 중 또 한 구절이 떠오른다. 心正則 筆正(심정즉 필정), 즉 마음이 반듯하면, 글씨가 반듯하여 진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잠깐이었지만 붓을 잡고 난 후 어쩐지 내 몸가짐에 묵향이 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체본 : 서예 학습에서 본보기가 되는 글씨본
*전서 : 고문(古文) 자체와 서풍이 정리된 것
*예서 : 한문 글씨인 고전 팔체서의 하나인 소전을 직선적으로 간략하게 만든 것.
*해서 : 예서에서 변이(變移)된 것으로서 필획(筆劃)에 생략이 없는 서체.

남혜윤 기자 elly@yonsei.ac.kr
사진 유승오 기자 steven103@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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