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비망록]

하얗다 못해 눈이 부시도록 텅 비어있는 문서 창. 깜박이던 커서가 이내 몇 글자를 적다가 지우길 반복한다. 기자 일을 한다는 나에게 혹자는 말했다. “글 좀 쓰시겠네요.” 글쎄. 글을 맛깔나게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자는 글을 ‘좀’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발이 ‘좀’ 빠른 사람이어야 한다. 취재한 정보를 글로 풀어내기 이전에 전달할 정보를 얼마나 부지런히 알아내는지가 중요한 셈이다.

취재수첩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글자들로 두둑한 주에는 깜박이는 커서가 신나게 글을 뱉어놓는다. 「연두」110호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를 취재할 때였다. ‘대학생과 문학’이라는 큰 아이템을 정해놓고 ‘요즘 학생들은 예전만큼 교양서적을 읽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한 기사였다. 구체적이지 못한 기사 방향에 자신이 없어 일주일 내내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재학생, 교수와의 인터뷰는 기본이고, 도서관에 자료를 신청한 것은 물론, 신촌에 위치한 주요 서점들을 일일이 방문해 준비한 질문들을 차례대로 던졌다. 결국엔 만나지 못했지만 서점을 소재로 한 연극을 연출한 동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고, 사회과학서점의 위치와 분위기를 알기 위해 ‘독수리다방’을 운영했던 ‘독수리약국’의 주인 할머니를 찾아가기도 했다. 수첩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종이들이 한 주의 취재들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넘쳐나는 정보들을 글로 풀어내는 데 애를 먹기는 했지만 기사의 질은 취재량과 비례한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반면 「연두」119호 ‘루머의 정치학’이 완성되기까지 커서가 깜박였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길었다. 루머라는 아이템 자체가 가진 한계 때문에 발로 뛰는 취재 자체가 힘든 점도 있었지만, 문서와 사후 확인 중심으로 이뤄지기만 했던 부족한 취재량은 기사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모호한 기사 방향을 구체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없을지 ‘앉아서’ 애꿎은 머리만 잡아 뜯었던 게 화근이었다. 기사의 질을 결정짓는 것은 화려한 글 솜씨가 아닌 무식할 만큼의 발 빠름이었던 것을.

그래서 문서 창의 커서는 오늘도 나를 채근한다. 머리가 아닌 ‘발’로 쓰는 기사를 내놓았냐고.

 

김한슬 기자 gorgeous@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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