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비망록]

법학에서 악과 선을 나누는 기준은 도덕적인 잣대보다 훨씬 엄격하다. ‘나쁘고 착함’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여부로 나눈다. 즉, 법률관계의 발생·소멸·효력에 영향을 미칠 어떤 사항을 ‘아는 것’만으로 법학에서는 ‘악한 의도’를 품은 것으로 여긴다.

법의 ‘법’자도 모르다가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에 휩싸였다. 3학기 째 몸담고 있는 신문사에서 나는 ‘악의’로 가득 찬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문회관 앞 시위를 하던 한화 노동조합 노동자들을 취재 할 때였다. 노동자들은 한화의 부당한 행위들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원했다. 노동쟁의, 지방노동위원회 등 처음 듣는 용어들이 혼란스러웠지만, 이 이야기를 기사에 담아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측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이 분야에 대해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잘 알지 못했던 나는 사측의 이야기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결국, 노동자들의 설움과 분노를 지극하게도 ‘알았으면서’ 모든 내용을 기사에 담아내지 않았다. 그분들의 처지는 ‘알았지만’, 정확히 사안을 집어내지 못한 나 자신 때문에 사측의 입장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이 일화를 통해 아무리 좋은 기사를 쓰더라도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의 내 의지는 한 풀 꺾이고 말았다. 결국, 한화 노조 기사는 사실을 ‘알았지만’ 내 ‘악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기사가 돼 버렸다.

‘악의’의 반대말은 어떤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즉 ‘선의’다. 알지 못하는 것만으로 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알지 못한 편이 나았을 것 같다. 하지만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실들을 ‘알게’되는 건 피할 수 없다. 분한 것은 내 자신이 그 때마다 상황과의 타협을 통해 적당히 ‘아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기자로서의 마지막 한 학기, 수많은 사실들을 인지하는 내 ‘악의’를 넘어서, 더 ‘악하게’ 진실을 파고드는 ‘악인’이 되고 싶다.

김희민 기자 ziull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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